▲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양키'(Yankee)는 미국인을 비하하는 호칭이다. 본디 영국인들이 미국 북동부로 이주한 네덜란드계 이민자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남북전쟁 때엔 북부 노예 해방 주에 대한 비칭으로 쓰였고, 그 뒤론 그냥 미국 사람 전반을 일컬었다고 한다. 보통 시끌벅적한 영어를 쓰며, 타국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인을 가리킨다. 현대 들어 세계 곳곳에서 반미 시위를 할 때마다 나온 “양키 고 홈!”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국가와 상관 없이 백인이면 다 싸잡아 '양키'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내 미군 주둔지엔 으레 '양키시장'이 성업을 이루며 북적거렸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품을 판매했는데, 일꾼들이 미군 몰래 빼돌린 물자를 공공연히 시장에 내다 팔았다. 미군복·침낭·커피·양주·화장품·담배·초콜릿·비상식량 등 거래 물건도 다양했다. '불법 상행위'였지만, 당국에선 근근이 먹고사느라 벌이는 장사를 묵인하기 일쑤였다. 미군 물품을 팔거나 사면 처벌을 당한다는 미군정의 경고와 포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군이 주둔했던 인천에도 양키시장(송현자유시장)이 존재했다. 동인천역 배다리 중앙시장 아래에 자리했던 그곳을 인천인들은 그저 '양키시장'으로 통칭했다. 학창 시절 여기서 청바지나 미군복을 구입해 줄여서 입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지금이야 국내 생산이 흔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유명 청바지는 양키시장에서만 팔았다. 물을 들인 미군 전투복도 즐겨 찾던 품목이었다. 당시엔 양키시장에서 이들 옷을 사는 일을 무슨 '자랑거리'로 여기기도 했다.

동구에서 추진하는 동인천역 북광장 복합거점 개발 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소식이다.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한 시 추가경정 예산에 송현자유시장(일명 양키시장) 보상비 365억원을 반영해서다. 송현자유시장은 재난 위험시설물 D등급을 받는 등 노후화한 시설로 안전사고 우려를 낳는 상황이다. 동구는 빠른 원도심 정비를 위해 시와 인천도시공사에 동인천역 북광장 일대를 공영개발 방식으로 해달라고 건의했다. 송현자유시장을 포함한 동인천역 북광장 주변은 2007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으나, 개발 방식을 여러 차례 바꾸면서 15년 넘게 사업의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젠 잊혀진 과거일 뿐인 양키시장이지만, 표지석이라도 남겨 애잔했던 우리의 생활사를 그려냈으면 어떨까 싶다. 현장은 사라져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인천인들에게 치열했던 삶의 '뿌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무튼 시민들은 동인천역 북광장 개발을 원활하게 추진해 일대를 새롭게 가꾸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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