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후 일제 강점기에도 인천에선 연극과 영화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역사는 자못 깊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천지역 연극·영화는 극장과 더불어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렇다 할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던 때, 한줄기 희망과 탈출구로서 작용했을 듯싶다.
인천에선 이미 1895년 극을 펼치는 협률사(協律舍·경동)가 설립됐다. 국내 첫 극장으로 알려진 애관의 모태이다. 협률사는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사용했는데, 우리나라 최초 공연장으로 인정을 받는다. 1902년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앞섰다. 협률사는 1912년 이름을 축항사(築港舍)로 바꿨고, 애관(愛館)이란 명칭은 1921년부터 쓰였다. 인천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한 곳은 표관(瓢館)으로, 1914년 10월30일 개관했다고 알려진다. 영화뿐만 아니라 뉴스·단편 희극·활극 등을 연속으로 보여줬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로 미뤄 인천은 일찌기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고 보인다. 인천 출신 극작가 함세덕(1915∼50년)이 활약한 일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의 <해연>과 <무의도 기행> 등은 80여년 전 작품인데도 전혀 손색 없이 현재도 공연에 오를 정도다. 엄혹한 시절, 연극 공연으로 억눌린 조선인들의 삶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듣는다. 그렇게 타 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앞서나간 인천은 지금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후 인천은 서울에 밀려 문화활동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1970년대 들어 중구 경동과 신포동 등지를 중심으로 '소극장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연극을 통해 옛 영화(榮華)를 되찾자는 몸부림이었다. 이에 발맞춰 대학가에도 연극 동아리가 활약했으니, 인하대 '인하극예술연구회'가 빛을 발한다. 1973년 창립해 고(故) 정진 배우 지도 아래 연극 기반을 다졌다. 1985년 제10회 대학연극제에 참가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우수상을 탔고, 1997년 제20회 대학연극제에선 창작극 '낙선재의 꿈'으로 금상과 희곡상을 받기도 했다.
인하극예술연구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연극 '혈맥'(1948년 김영수 작)을 무대에 선보인다. 6월7일~10일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때,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민초들의 삶을 주시한다. 인하극회는 당대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 맞닿은 형식의 변화를 통해 우리 삶을 되짚는다. 좋은 도시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인하극예술연구회의 건재가 인천 문화의 밑거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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