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가 '풍산동'을 '미사3동'으로 바꾸는 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사리 시절부터 유명세를 치른 덕에 급기야 '미사' 강변도시라는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으니, 풍산동 아파트단지 입주민들이 동명 변경을 원하는 마음을 이해할 만하다.
새 이름이 지어지면, 미사리 조정호가 있는 곳이 미사1동, 북서 방향 한강이 휘돌아 꺾이는 지역이 미사2동, 그 남쪽 현 풍산동 일대가 미사3동이 된다. 한강의 하중도 미사섬에서 비롯된 지명이 점점 영토를 넓혀 하남시 북쪽 일대를 뒤덮는 셈이다. 미사(물결치는 모래)는 도시답고, 풍산(풍년 비는 뫼)은 농촌다운 탓일까.
풍산동을 미사3동으로 바꾸는 안을 가지고 주민 설문조사를 해 보니 97%가 찬성이었다고 한다. 조사에 응한 주민 가운데 선주민 비율이 높은 1통 지역은 변경 찬성 비율이 23%였다. 아무래도 귀에 익은 이름을 선호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그러나 지명이야 원래 시류와 인심을 따라 변하는 법이니 수백 년 묵은 동명이라 해도 바꾸지 못할 이유는 없다. 풍산동의 풍 자를 전해준 덕풍리도 원래 '덕봉'이었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덕풍으로 변했다 한다. 풍산의 나머지 한 글자, 산 자는 황산리(거칠뫼)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미사동과 풍산동 일대는 서울 강동구에 딱 붙은 시가지이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서울 근교 비닐하우스 농사 지대였다. 이곳에서 출하되던 상추 양이 서울 채소 가격을 좌우하던 시절도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가 김용기 선생이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웠던 동네가 바로 풍산동이다. 일가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향리(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이상적 농촌 세우기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 한국전쟁 후 황무지였던 풍산동(당시 광주군 동부면) 터를 맨손으로 일군 일가는 농촌을 개혁해야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농군학교를 시작했다. 일가 선생은 196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새마을운동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80년대까지 전국의 공무원, 교사, 대기업 임직원은 한 번쯤 가나안농군학교 합숙 연수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미사동과 풍산동 일대에 불어 닥친 개발 바람으로 인해 풍산동 농군학교는 결국 2014년 양평으로 이전했다. 미사역사공원 내에 2021년 개관한 하남일가도서관과 일가기념관은 풍산동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있었다는 흔적이다.
아무튼 동 이름이 사라지기 전에 풍산의 기억들이 잘 정리되면 좋겠다.
/양훈도 논설위원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