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부두는 과거 우리나라 3대 어항으로 꼽힐 만큼 성황을 이뤘다. 하도 돈거래가 활발하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이곳을 지나다니던 개들도 돈을 물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수는 꽃(花)과 바닷물(水)을 뜻하는 한자어. 화수동은 한때 바닷물이 넘어 들어온다는 우리말 '무네미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화수동은 한 세기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동네다. 구한말 열강에 문호를 개방한 근대 문물의 산실이자, 인천 근현대사 시작점이다. 외세의 개항 요구에 대비해 1879년 포대와 진지를 갖춘 화도진을 설치하기 전엔 초가 몇 채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1883년 인천 개항을 맞아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화도진은 일본·중국·미국 등 열강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요새다. 병영을 비롯해 한미수호조약기념비와 유물전시관 등이 놓여 있어 지난 날 수도로 통하는 요충지로서의 인천을 만날 수 있다. 화도진공원은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조성한 곳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화수부두는 1970년대까지 수도권 제일의 수산물시장을 자랑했다. 연평·백령도 등 인천 근해에서 잡은 생선의 집하 부두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부들의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선과 연안여객선들이 지금의 연안부두로 빠져나가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뒤늦게나마 수산물직매장과 회센터를 건립해도,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엔 역부족이다.

화수동은 임해공업지역으로도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엔 조선기계제작소 기숙사가 이곳에 있었다. 근대 공업의 역사는 동일방직·한국기계공업·일진전기·두산중공업·현대제철 등 굵직한 기업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번화가로 변모한 이유다. 이처럼 뱃사람·노동자·상인 등의 배후 주거지로 왕성함을 누렸지만, 요즘은 시대 흐름에 밀려나 그 영화는 풍문에 의존할 뿐이다.

인천시가 이런 화수부두 주변 지역을 새롭게 가꾸겠다고 밝혀 주목된다. 환경을 개선하고 활기찬 부두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의지다. 지난 6일엔 '빛의 항구' 화수부두를 연출하는 용역 착수보고회를 열었다. 시는 넓게는 동구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마중물 사업을 구상 중이다. 화수부두 일대 야간경관 사업은 슬럼화하고 있는 부두 인근 환경을 새롭게 바꾸고 동구 지역 발전의 계기·전환점으로 작용하리란 게 시의 예상이다.

화수부두의 옛 정취를 살리려고 힘을 쏟아 침체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한몫을 하길 바란다. 여기에 화수동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도록 하려면, 주민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화수부두와 화수동이 또 하나의 인천 명물로 재탄생하길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