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 넉넉해야 예의도 차리는 법
▲ 김내혜 전각 작가의 '李重煥(이중환)' 전각.
▲ 김내혜 전각 작가의 '李重煥(이중환)' 전각.

''개발이익환수법' 여야 설전…국토위 파행'(인천일보 11월23일자 2면) 머리기사이다. '땅의 이용에 관한 책 <택리지>에 대해 글을 쓰는 중이라 더욱 관심이 간다. 여기에 '대장동'에 분노한 터라 오랜만에 여야가 손잡고 입법을 하나보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야당의 반대로 법안을 상정조차 못했다. 내 기대가 그야말로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 머리에 뿔이 나면 내 허락하지.(烏頭白馬生角 乃可許耳)” 짝이다. 전국 시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일찍이 진(秦) 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일이다. 단이 견디지 못하고 진왕에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까마귀-' 운운은 '절대 보내주지 않는다'는 진왕의 대답이다. 어찌 흰 까마귀와 뿔난 말이 생기겠는가. 전하여 저 말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뜻한다. 배부른 돼지에게 나는 법을 알려주는 것 같이.

저 야당에게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을 차라리 이중환 선생에게 찾아본다. 선생은 <택리지>를 쓸 당시 철골(徹骨)의 가난을 짊어진 방안풍수 방랑자였다. 그런데도 한 땀 한 땀 백성들이 사는 땅에 대해 써내려갔으니 그 기록이나 보자.

(3)회에서 <택리지>가 다양한 제목으로 필사되었다고 하였다. 그만큼 이 책이 여러 분야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하지만 선생이 <택리지>에 쓴 발문이 '팔역지발문'인 것으로 미루어볼 때 최초 이름은 <팔역지>인 듯하다. 이러한 필사본이 활자본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육당 최남선의 교정으로 간행된 <택리지>부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는 방랑하는 처지였다. 선생은 <택리지> '총론'에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써놓았다.

“동쪽에도 살 수 없고 서쪽에도 살 수 없으며 남쪽에도 살 수 없고 북쪽에도 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살 곳이 없다. 살 곳이 없으면 동서남북이 없고 동서남북이 없으면 곧 사물 구별이 확실하지 않은 태극도(太極圖,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태극은 천지가 분화하기 전의 원기를 말한다”(太極謂 天地未分前之元氣)고 주장했다)다. 이렇다면 사대부도 없고 농공상도 없으며 또 살 만한 곳도 없으니 이것을 땅이 아닌 땅이라 한다. 이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기를 짓는다.”

선생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기”를 짓는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으려 하였다.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는 '사대부'란 말에 눈길을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말하는 '사대부=백성'이니 오해를 말아야한다. 이는 '사민총론'을 보면 알 수 있으니 몇 줄 뒷면 해명된다. 선생은 <택리지>를 삶과 지리의 상호작용을 치밀하게 살핀 실학적 인문지리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 네 분야로 나누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사민총론'부터 일별해보겠다.

'사민총론'

구체적으로 사대부 신분이 농공상민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사대부가 살 만한 곳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선생의 '사민총론'(四民總論) 첫 구절을 보면 사민관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사대부란 게 따로 없고 모두 민이었다. 그런데 민은 네 가지로 나뉘었다. 사(士)로서 어질고 덕이 있으면 나라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을 못한 자는 농공상이 되었다. 옛날에는 순임금이 역산에서 밭 갈고 하빈에서 질그릇을 구웠으며 뇌택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 임금 밑에서 벼슬하지 않으면 농공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 대저 순임금은 천고의 민으로서 표준이다. 나라의 다스림이 극치에 이르면 너도나도 다 민으로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서 먹으며 유유히 즐거워하는데 어찌 그사이에 등급과 명호(名號)가 있으랴.”

선생은 애초에 사대부는 없고 모두 백성(民)이었다고 한다. 또한 순임금이 임금이 되기 전에 농공상이었다며 백성의 표준이라고까지 한다. 결국 선생이 생각하는 사농공상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계급이 아닌 직업일 뿐이요, 사대부란 일반 백성을 말함이다. 그야말로 평등사상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셈이다. 그리고 선생은 “농공상이 천한 신분이 된 것은 사대부라는 명호가 생기면서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사대부란 명호는 없어지지 않는다며 농공상 모두 사대부 행실을 닦자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이거나 농공상이거나 막론하고 사대부 행실을 한결같이 닦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예도(禮道) 아니면 안 되고 예도는 넉넉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선생 말을 촘촘히 들어보자. 선생은 사농공상 누구나 선비로서 행실을 닦자고 하였다. 그러려면 예의가 필요한데 넉넉함(富)이 전제 조건이라 한다.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부'가 있어야만 '예의'가 있고 나아가 '선비'로서 행실을 닦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가정, 직업, 예의, 문호를 유지하기 위해 계책을 세우려고 살 만한 곳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강호제현들께서는 사는 주변을 둘러볼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이 넉넉함이 있는 살만한 곳인지를, 그래야만 예의의 행실을 닦을 수 있으니 말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