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을 가장한 비난이 난무하다. 그나마 사실이면 다행, '아니면 말고' 식 '비평의 탈을 쓴 비난'이 상당수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가 아닌 “자세히 보아야 안 속는다.”

때가 때이니, 더욱 그렇다.

사실의 탈을 쓴 거짓에 속아 엉뚱한 선택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몇 차례 겪었다. 여름날 서울 한복판을 뛰어도 봤고, 한겨울 옆 사람 체온에 기대 아스팔트 위에서 목청껏 소리쳤다.

진흙 속 진주를 알아볼 눈과 귀가 되어 줄 비평은 없고, 교묘하게 비평처럼 포장된 비난에 속았다. 그렇게 갈라치기 된 여론은 자기 입맛대로 언론을 고르고 재갈을 물린다. 사실을 쓴 언론은 '기레기'가 되고 거짓을 포장한 기사에 찬사를 보낸다. 반대된 상황에서는 기레기가 참언론인으로 승격된다.

'기록하는 사람'을 직업으로 택했다. 그 덕에 19년째 입에 풀칠하고 있다.

고기반찬과 기름진 음식이 매 식탁에 오르진 못해도, 밥은 굶지 않는다. 카드값이 할퀴고 간 통장 잔고를 보며 한숨짓지만 자존심은 세다.

2003년부터 지금껏 하루 평균 200자 원고지 7∼8매씩 꼬박꼬박 써댔다. 그 세월 원고지 수 만장이 기사로 태어났다. 거기에 적힌 글자는 태양계에 떠도는 소행성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만 아는 사실을 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누가 들을까, 혹여라도 눈치챌까 슬그머니 글을 쓴다. 그러다 사실을 뒷받침할 사례나 피해자가 적을 때 글쓰기를 멈추거나 주저해야 한다. 난 수차례 그러지 못했다. 사실처럼 보이지 않을까 사건을 부풀릴 때도, 피해가 클 것이라며 우려를 더욱 부채질한 적도 있다.

비평이랍시고 잘잘못을 따졌지만, 막상 써놓고 보면 비난 일색인 경우도 태반이었다. 지금껏 비평과 비난의 경계를 모르고 사는 글쟁이가 아닐까 싶다.

<위대한 개츠비>를 펼쳤다. 요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이다. 현대의 고전이라 칭한 이 책을 이제야 읽는다.

첫 장부터 주옥같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노르웨이 숲>에서 와타나베는 세 번씩이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고, 나가사와 선배는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은 와타나베에게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아직 와타나베처럼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치며 '재미'를 찾진 못하지만, 첫 장에서 이런 말을 접하니 꼭 무슨 계시를 받은 느낌이다.

이제 함부로 비판하지 않겠다. 비판은커녕 비난조차 구분 짓지 못하는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남의 사정도 모르고 비판이랍시고, 비난만을 쏟아내는 자를 만난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더라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인식되겠다.

때가 때이다.

우리나라를 이끌 대통령 선거일(2022년 3월9일)이 100여일 남았다. 그리고 내년 6월1일 제8회 동시지방선거로 우리 동네 일꾼을 뽑는다. 대선이 본격화되며 후보별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뭐가 사실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내년이 되면 비판과 비난의 경계는 더욱 모호할 것이다. 심지어 대선에서 쏟아진 비평과 비난이 특검 등 법의 심판대에 오르면 그나마 난무하던 비판과 비난마저 사라질 판이다.

지금, 비판의 가면을 쓴 거짓을 구분 짓지 못한다면 언제고 서울 한복판을 다시 뛰어야 하고, 한겨울 옆 사람 체온에 기대 아스팔트 위에서 피켓을 들어야 한다. 비난을 비판으로 읽어내는 우를 범하면 “잘살아보세”,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란 화두에 갇혀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

내년 지방선거 최대 승부처는 대선 결과란 인식이 강하다.

지방선거가 자취를 감췄다. 흰고무신을 주지 않고 그만큼의 돈을 퍼준다 해도 지방선거에 관심 갖는 시민은 별로 없다. 이 때문에 비판과 비난을 제대로 가려내지 않는다면 지방선거 또한 죽 쑬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나저나 <만추>의 훈과 애나는 재회했을까. 만추가 가을 끝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주영 자치행정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