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떠돌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이 만들어낸 산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국가장(國家葬)을 본다. 정부는 국가장이라 하나 많은 이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래는 필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國民葬) 때 써 놓은 글의 일부다.

“'나무와 사람은 누워보아야 그 크기를 안다'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승승장구한 정치인 스탠튼, 시골뜨기 청년 링컨의 학벌이나 생김새를 가지고 '시골뜨기 고릴라'라고 조롱하였다. 그런 그가 링컨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크게 울며 한 말이란다. <중략>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니, 오늘은 슬퍼해야겠습니다.” “미안해하지 마라.” “아니, 오늘은 미안해해야겠습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국(시)민장이 진행되며, 옆에 서 있는 사내가 눈가를 연신 훔치는 것을 보았다. 50세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였다. 20대 후반 큰 몸집의 청년은 이 더운 날에도 검은 예복을 차려입었다. 넥타이도 단추도 제 자리에 잘 정돈되었다. 나도 하늘을 쳐다봐야만 했다.“

2021년 10월, 12년 전 5월 하늘의 그 곡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이유는 저 이가 이 땅에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 노력해서가 아닐까 한다. 정치 지도자라면 제 일신의 영달이나 패거리와 협잡이 아닌, 저 정도의 화두(話頭)를 잡아야한다. 전제 왕권 국가 시절인 조선, 이중환 선생은 철골(徹骨)로 먹을 갈고 마음을 도스르고 붓을 잡아 <택리지>에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을 한 땀 한 땀 손등에 푸른 힘줄이 솟도록 써넣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할 실학 정신이다. 조선 실학을 개척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쓴 선생의 묘갈명부터 본다.

▲ 성호 이익 초상화. 성호박물관 소장(성호박물관에 문의한 결과 아래 초상화는 1989년에 그려졌다. 문중에서 소장하였던 성호 이익 초상화는 6·25 때 소실되었다. 이에 조카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1729~1813)의 영정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렸다고 한다. 화가는 알 수 없다.) 조선 실학 개척자인 성호 이익이 선생의 묘갈명까지 써준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 관계는 각별했다. 이익의 후처와 선생의 전처가 같은 사천 목씨 집안 출신이고 당사자들끼리도 재종조부 사이다. 재종조부라 하여도 나이는 불과 아홉 살 차이였지만 선생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익은 선생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였고 <택리지>에 서문과 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 성호 이익 초상화. 성호박물관 소장(성호박물관에 문의한 결과 아래 초상화는 1989년에 그려졌다. 문중에서 소장하였던 성호 이익 초상화는 6·25 때 소실되었다. 이에 조카인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1729~1813)의 영정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렸다고 한다. 화가는 알 수 없다.) 조선 실학 개척자인 성호 이익이 선생의 묘갈명까지 써준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 관계는 각별했다. 이익의 후처와 선생의 전처가 같은 사천 목씨 집안 출신이고 당사자들끼리도 재종조부 사이다. 재종조부라 하여도 나이는 불과 아홉 살 차이였지만 선생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익은 선생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였고 <택리지>에 서문과 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는데도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부지런히 배우지 않고도 문장이 훌륭하였다. 젊은 나이에도 문체가 점잖고 우아하였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다. 자장(子長)의 책을 더욱 깊이 읽어 이따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문장이 깊고 넓고 왕성해서 의식과 법이 되었다. 아마도 화려한 관직에 올랐으면 문덕으로 다스리는 문치를 갖추었으리라. 그 당시 조정에 오른 학사들과 시 모임을 결성하여 지은 아름다운 시편들이 많은데,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들은 혹 신이 돕는 듯하였으니 학사들 중에 그와 어깨를 견줄 이가 없었다.”

다소 과장된 묘갈명인 듯하지만 쓴 이가 이익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익은 같은 글에서 “험한 것은 세상이요, 뜻을 얻지 못한 것은 운명이다. 남긴 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집안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으니 과연 누가 알아줄 것인가”라며 선생이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애석해 하였다.

<택리지>는 조선의 산천과 지리, 인심과 풍속 및 인물, 물화 생산지와 역사를 담아냈다. <택리지> 이전의 지리책은 군현별 연혁,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역원, 능묘 등을 나누어놓은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러한 백과사전식 서술을 전연 따르지 않았다. 선생이 직접 발로 걸어 다니며 기록하였기에 지방에 따라 다채로운 견해를 담았다. 또한 선생이 전국을 실제로 답사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했기에 사실적인 기록이다.

“자연과 인문을 합한 실학적 사고로 탄생한 세계 최초의 실증적 인문지리서”라는 <택리지>의 별칭은 이에 연유한다.

선생이 이 책을 쓴 데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이 작용했다. 선생에게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게 드러난다. 선생은 조선을 '소중화'라 칭하면서도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이기에 대등한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전설적인 산인 곤륜산을 '팔도총론'의 시발점으로 삼아 백두산까지 연결시킨다. 선생의 가계는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이었다. 선생은 처가인 사천 목씨, 목호룡 고변 사건 등에 혐의를 입어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였다. 딱히 어딘가에 정착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듯하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택리지>다.

이렇듯 선생이 <택리지>를 쓴 경위에는 남인이라는 당파성과 전국을 떠돌 수밖에 없는 개인적 비극이 숨어 있다. <택리지> 발문을 쓴 목성관(睦聖觀, 1691-1772), 목회경(睦會敬, 1698-1782), 이봉환(李鳳煥, 1685-1754), 서문을 쓴 정언유(鄭彦儒, 1687-1746), 이익도 모두 근기 남인이었다.

선생은 <택리지>에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설명과 서술을 담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단순히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을 배격하고 백성들이 살 만한 이상향을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찾으려 하였다. '·지·리·적·환·경', 이 다섯 글자에 방점을 두두룩하게 찍어야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총, 균, 쇠> 2장은 바로 이 지리적 환경을 다루고 있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