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로 엉클어진 한국말 풀어내야
▲ 일정한 지역(口) 안에서 꿇어앉은 사람(巴)을 형상화한 글자가 邑(읍)이다. /그림=소헌
▲ 일정한 지역(口) 안에서 꿇어앉은 사람(巴)을 형상화한 글자가 邑(읍)이다. /그림=소헌

아내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그녀가 열여섯 살에 이곳 정읍井邑으로 시집 온 후 거의 매일 두승산에 올랐으니 올해로 꼬박 10년이 다 되었다. 상수리나무 군락 사이로 연한 홍색을 띤 구절초가 다투듯 피어올랐다. 한 송이 꺾어 쥐니 진한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손끝으로 한 잎 두 잎 떼어내다가 이내 바람개비 날리듯이 입김으로 훅 불어 냈다. 행상꾼 아낙네로 살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동쪽 상학리 들녘에는 황금빛이 펼쳐졌고, 남서쪽으로는 노적봉과 끝봉이 젖가슴처럼 봉긋하다. '괜한 말을 했나?' 망화대 옆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은 아내는 아무래도 며칠 전 행상을 떠나는 남편에게 한 꿈 이야기로 뒤숭숭했다. “오늘은 일 나가지 마세요. 아 글쎄 간밤 꿈에 앞니 한 개가 툭하고 빠져버리지 뭐에요?”

남편은 짐짓 신이 났다. 이번에 메고 나온 공단(무늬 없는 비단) 스무 필을 글쎄 고부古阜 장에서 다 팔아 치웠기 때문이다. '한 필은 아내가 입을 저고릿감으로 남겨 두자'. 장터를 뒤로한 채 고개를 오르면 고부면을 감싸고 도는 후미진 능선이 나오는데, 바로 안쪽으로 운선사가 자리한다. 거기서부터 10리를 더 가면 유선사가 있는 정상에 이른다. 여기에는 큰 나무와 잔디가 어우러져 한 숨 쉬기에 좋다. 이제 두 봉우리만 넘으면 된다. '오늘은 달이 밝으니 조금 험해도 이 길로 가야겠다.' 하지만 어쩌랴. 남편은 오봉현에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만다.

 

하 노피곰 도 샤 (달님이여 높이 돋아서)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져재 녀러신고요 (시장에 가 계시는지요?)

어긔야 즌 데 드데욜셰라 (위험한 길을 디뎠을까요?)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디라도 짐을 내려놓으세요)

어긔야 내 가논데 졈그 셰라 (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려워요)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하루 이틀 사흘이 가고 달이 지나도 남편은 오지 않는다. 아내의 애원은 허공에 날아가 버렸고, 그 자리에서 변하여 망부석이 되었다. (필자가 각색한 초단편소설 '정읍사井邑詞')

 

[우물 / 마을]

①갑골문으로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은 글자 중 하나가 井(정)이다. ②물을 긷기 위하여 땅을 판 후 흙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난간(井)을 만든다. ③어렸을 적에 '퐁당 퐁'이라고 했던 글자( )가 井(정)의 본 자다.

 

邑 읍 [고을 / 도읍]

①邑(읍)에서 口(구)는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며 巴(꼬리 파)는 사람이 꿇어앉은( 변형) 모습이다. ②부수 /邑(읍)은 고을, 도읍 등 넓은 땅이나 국가를 뜻하며 다른 글자의 오른편에, 모양이 같은 /阜(언덕 부)는 비교적 좁은 땅을 뜻하며 다른 글자의 왼편에 위치한다.

 

고대가요 '정읍사'는 지금까지 전하는 백제 시대의 유일한 노래이며, 한글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한글날에 '한글타령'만 하지 말고 외래어로 엉클어진 한국말을 풀자. 부드럽고 아름다운 한글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 하 머리곰 비취오시라.”

/전성배 한문학자. 민족언어연구원장. <수필처럼 한자> 저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