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서 매춘부로…누가 그녀를 내몰았나
▲ 영화 '오하루의 일생' 중 계승자를 낳아줄 영주의 첩으로 팔려간 오하루의 모습.
▲ 영화 '오하루의 일생' 중 계승자를 낳아줄 영주의 첩으로 팔려간 오하루의 모습.

속박의 굴레에 묶인 꼭두각시 '인생들'

“넌 아직 내 딸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오하루는 부모가 자신을 영주의 첩으로 보내려고 하자 완강히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손찌검을 하며 강압한다. 궁녀였던 오하루는 하층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겨난 후 아버지의 원망과 학대를 받아왔는데, 이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계승자를 낳아줄 영주의 첩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남성들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가부장제 봉건사회의 꼭두각시가 되어...

영화 '오하루의 일생'(1952)은 17세기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일본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봉건사회의 희생양이 되어 궁녀 신분에서 결국에는 매춘부로까지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질곡 많은 삶을 비극적으로 담아낸 일본 거장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대표작이다. '원 신 원 쇼트 (one scene one shot)' 롱테이크 촬영기법의 관조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자신의 누이가 게이샤(기녀)로 팔려가는 걸 지켜봐야 했던 감독의 뼈아픈 가족사가 반영된 영화이다.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의 비극적인 인생 조명

으슥한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야한 기모노 차림의 여인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허탕만 치고 헤매다가 절 근처에 이른 늙은 매춘부는 뭔가에 이끌리듯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오백나한상을 바라보다가 나한상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 기억 속의 남성들을 떠올리게 된 여인은 기둥에 기대어 지난날을 회상한다. 영화는 젊고 아름다웠던 궁녀 시절부터 오하루의 과거를 훑으며 가부장제 봉건사회 속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에 의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영주의 첩, 기녀 등으로 팔려가다가 결국에는 거리의 매춘부라는 밑바닥 인생으로까지 전락하고 만 여인의 비참하고 가련한 일생을 조명한다. 여성으로서 오하루는 한평생을 남성들이 규정해 놓은 가부장적 틀 속에 갇혀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사실 오하루의 일생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여성들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동병상련의 운명을 비춘다. 억압적인 동아시아 여성관의 연원을 쫓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중국 한대(漢代)의 〈열녀전〉과 맞닿게 된다. 한무제(漢武帝)가 모계 전통을 없애고 부계사회를 확립한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평가한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원시 유교를 가부장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이후 여성의 지위는 완전히 종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대 이후의 중국 여성들은 〈열녀전〉 속 여성상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어릴 때는 부모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노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지키며 살아야 했다. 이제 여성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남성 권력의 재현물이자, 남성 욕망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의 가부장적 유교 이데올로기는 봉건시대 조선, 일본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여성들의 권리를 옥죄는 거대한 굴레를 형성하게 된다. 그 굴레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채 동아시아 여성들을 옭아매고 있다. 사실 가부장제의 굴레는 여성들에게만 씌워진 것이 아니다. 남성들 역시 신분, 부, 권력 등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 위계질서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윤회의 굴레에 묶인 동병상련의 꼭두각시 운명인 것이다. 시련과 고통의 인생길 막바지에 이르러 갈림길 앞에 선 오하루는 이제야 비로소 속세의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고 미완의 삶을 완성시킬 '구도의 길'을 떠난다.

불교 경전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는 성별, 나이, 신분, 종교를 초월하여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진리를 구한다. 선재 동자가 구법행에서 만난 21명의 여성 선지식 중에는 유녀(遊女) 출신의 바수밀다 여인도 있다. '탐욕의 경계를 여읨'이라는 보살의 해탈을 얻은 그녀는 애욕과 탐욕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는 지혜의 선지식이다.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감각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내 안의 불성(佛性)을 발견할 때, 우리는 “만물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갖가지 꽃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아름답게 공존하는 화엄의 세계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하나 속에 전체, 전체 속에 하나(一卽多多卽一)'의 진리 안에서...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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