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가파르게 증가한다.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연일 1600명대를 오르내리며 온 국민을 위협한다. 한반도 관문도시인 인천엔 국제공항과 항만이 자리해 어느 곳보다 감염병 앞에 취약하다. 그런데도 인천엔 감염병 전문병원이 없다. 코로나19 같은 신종 감염병 발생은 빈번해졌지만, 인천에선 이를 제때·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인천은 100여년 전에도 감염병 전문병원을 세워 유명했는데, 과거보다 못한 현실이 딱하다.

인천엔 이미 오래 전 전염병 환자를 격리수용·치료할 수 있는 '덕생원'(德生院)이 운영됐다. 1921년 3월31일 세워졌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을 맞는 셈이다. 환자수용 인원은 수십명에 이르고, 입원료는 병실 규모에 따라 차등을 뒀다고 한다. 일제는 인천 개항(1883년) 이후 사동 9번지(현 답동 인근)에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할 격리병동을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거류민단(일본인 자체조직)에서 경영했다. 1914년부터는 인천부에서 직접 관리하다가, 1921년 3월 도산정 5번지(현 도원동 중앙여상 인근)로 증축 이전해 부립 덕생원으로 개칭했다. 대지 8900㎡, 건평 1335㎡ 규모에 26개 병실을 두었다. 인천에 마련한 현대식 첫 감염병 전문병원이다. 덕생원은 콜레라·천연두·유행성뇌척수막염·성홍열·발진티푸스 등 감염병 환자로 늘 만원이었다.

개항을 하면서 인천항은 외국 선박을 타고 온 사람과 물자, 문물이 드나드는 통로였다. 그래서 외래 감염병 유입 경로이기도 했다. 검역 필요성이 대두됐고, 1896년 오늘날 검역체계 골격을 이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검역규칙 '온역장정(瘟疫章程)'을 만들었다. 그 때도 “선박 내 역증(疫症)을 보이면 해관 의사가 지정하는 원처(遠處)로 이동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재 국가지정 격리 병실에 이송하는 격이다. 당시엔 '피병원(避病院)'이라 불렀다. 전염병 환자를 일반 주민들을 피해 격리하는 병원을 말한다. 1890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월미도 남쪽에 환자 6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병원을 세웠다는 기록도 보인다.

인천은 1898년 무렵 도시 외곽이었던 답동에도 피병원을 세웠다. 혐오시설이었던 탓에 계속 밀려나 도원동까지 갔는데, 바로 덕생원을 말한다. 덕생원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전염병 관리를 했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인천이 공항·항만 등 검역 최전선에서 벌이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사투는 관문 도시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외래 바이러스 침투를 막기 위한 책임감은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 인천은 전염병 발생 때마다 자유롭지 못한 경로도시이다. 향후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인천권에 감염병 전문병원을 지정하는 게 절실하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