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 물결 타고 국제 종합 물류항으로 발돋움


백제 때 능허대서 진으로 배 띄워
1883년 상하이발 기선 정기 취항
광복 후에도 이어지던 무역선 왕래
중국 공산화 및 6·25전쟁으로 단절

중국 개방화·공산국가 수교 힘입어
인적·물적 교류 담당 한중합작회사
위동항운 1990년 8월12일 설립하고
같은 해 9월15일 끊어졌던 뱃길 이어

항로 개설 초기 중국 오간 보따리상
'수출역군'으로서 IMF 극복에 일익
▲ 인천항 기점 대중국 10개 항로의 하나인 랴오닝성 잉커우항 풍경. /사진제공=범영페리주식회사 홈페이지

인천항으로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첫 뱃길은 1990년 9월15일에 열린다. 공산주의 중국과의 이 역사적인 항로는 수평선 넘어 웨이하이(威海)항으로 이어진다. 이어 1991년 12월24일에는 인천-텐진 항로도 운항을 개시한다.

중국과의 해로 교통이라면 먼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초고왕 27년(372)에 중국의 진(晋)에 사신을 보내 대중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凌虛臺)가 발선지(發船地)로 전해온다.

▲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운항 지도. 지도에서 보듯 인천항을 기점으로 웨이하이, 톈진을 위시해 중국 대륙 동쪽 연안 10개 항로를 운항한다./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운항 지도. 지도에서 보듯 인천항을 기점으로 웨이하이, 톈진을 위시해 중국 대륙 동쪽 연안 10개 항로를 운항한다./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근대로 들어와 개항 당년인 1883년 초, 화객(貨客) 운송을 목적으로 청국 상하이와 인천 간에 국제항로가 개설된다. 청국의 상하이 초상국(招商局)이 기선 남승호(南陞號)를 월 1~2회 상하이-인천 간에 정기 취항시킨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청국의 정크선은 끈질기게 저들 쿠리(苦力)를 실어 나르고 생필품 등의 무역을 위해 왕래를 계속해 광복 후에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 같은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는 중국 대륙의 공산화에 이어 6·25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단절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 상해 등지를 통한 간접 무역식 교류는 있었으나 인천항과 웨이하이항 간의 정식 항로 개설은 이 같은 두 나라 간 단절 40년 만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주목할 것은 인천으로부터 웨이하이항과 텐진항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1992년 8월24일에 있은 한중 국교 수립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른바 환황해권 시대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급작스럽게 카페리가 왕래하게 되고, 이어 국교 수립에 이르게 된 정치적 이면은 알 수는 없으나, 당시 국제 정세에 따른 중국의 개방화 바람과 우리나라가 추진하던 북방정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1978년 개혁과 개방을 표방하며 동쪽 연안의 선전(深圳) 등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부분적이나마 자본주의 시장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천안문사태로 일시 답보도 있었으나 1992년에 다시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인 1990년 우리나라는 공산권 종주국 소련과 수교를 맺고 이듬해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폈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펼친 이 같은 정책의 목표는 경제협력을 통한 교역과 투자의 증대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이렇게 양국의 이해가 맞으면서 두 나라 간에 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방식은 과거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를 통해 국교를 튼 전례가 있듯, 뱃길을 통해 수교의 대로(大路)를 연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90년 8월12일, 인천과 웨이하이 간의 항로 개설에 앞서 양국은 한중합작회사인 위동항운(WEIDONG FERRY, 威東航運)을 설립한다. 중국 측 위동항운유한공사는 중국 내에 법인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우리 측은 별도로 국내에 별도 ㈜위동항운을 설립한다. 이에 대해서는 인터넷 ‥DAUM백과… ¨기업사전〃의 내용을 소개한다.

 

▲ 단절 40년 만에 중국과의 물길을 튼 위동항운의 위동 페리호가 1990년 9월15일 역사적인 첫 출항을 위해 9월9일 인천항에 그 모습을 선보였다는 조선일보 9월10일자 기사./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 단절 40년 만에 중국과의 물길을 튼 위동항운의 위동 페리호가 1990년 9월15일 역사적인 첫 출항을 위해 9월9일 인천항에 그 모습을 선보였다는 조선일보 9월10일자 기사./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 1991년 6월29일자 조선일보 보도 사진. 한중 카페리 골든 브리지호를 타고 인천항에 내린 중국 동포들이 입국 수속을 밟 위해 방금 내린 페리호를 등진 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다. 페리호 취항 불과 1년도 안 된 기간이지만 많은 수의 교민들이 조국을 방문했다. 이후 보따리상들이 늘어나면서 인천항에는 늘 승객이 북적이게 되었다. /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 1991년 6월29일자 조선일보 보도 사진. 한중 카페리 골든 브리지호를 타고 인천항에 내린 중국 동포들이 입국 수속을 밟 위해 방금 내린 페리호를 등진 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다. 페리호 취항 불과 1년도 안 된 기간이지만 많은 수의 교민들이 조국을 방문했다. 이후 보따리상들이 늘어나면서 인천항에는 늘 승객이 북적이게 되었다. /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 한중 수교 이전인, 그리고 1990년 중국 웨이하이항 직항로 개설 전인 1988년 5월 말 현재 인천항을 통한 수출입 화물량이 1349만t으로 1987년 같은 기간보다 23% 증가했다는 1988년 7월10일자 조선일보 기사. '인천항에 중국 바람' '서해안시대 활짝'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 한중 수교 이전인, 그리고 1990년 중국 웨이하이항 직항로 개설 전인 1988년 5월 말 현재 인천항을 통한 수출입 화물량이 1349만t으로 1987년 같은 기간보다 23% 증가했다는 1988년 7월10일자 조선일보 기사. '인천항에 중국 바람' '서해안시대 활짝'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사진제공=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100

한·중 수교 이전인 1990년, 중국의 대외 개방 정책과 한국의 북방 추진 정책이 맞물리면서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키기 위해 한중 합작으로 위동항운유한공사를 설립했고, 최초의 카페리 직항로인 인천~위해 항로를 개설했다. 위동항운유한공사가 중국에 법인 등록되었기 때문에, 한국 측 주주들이 별도로 출자하여 위동항운유한공사의 한국 총대리점 격으로 ※위동해운을 설립했다.

▲ 날렵하고 상쾌한 모습의 위동항운의 페리선 뉴 골든 브리지 5호의 모습. 3만t급 이 배는 현재 인천-칭다오 항로를 각각 주 3회씩 왕복운항하고 있다./사진제공=위동항운 홈페이지
▲ 날렵하고 상쾌한 모습의 위동항운의 페리선 뉴 골든 브리지 5호의 모습. 3만t급 이 배는 현재 인천-칭다오 항로를 각각 주 3회씩 왕복운항하고 있다./사진제공=위동항운 홈페이지

1993년에는 인천~청도 간 카페리 항로를 추가로 개설했고, 2003년에는 인천~청도, 인천~위해 간 컨테이너선 공동 운항을 개시했다. 2010년 한·중 간 화물자동차 복합운송을 개시했다. 2012년 2월에는 경인항∼청도 컨테이너선 공동 운항을 개시했다. 2015년에는 한·중 카페리선사 최초로 인천~청도 항로가 전자상거래 화물 해상 특송 서비스 시범 운영 선사로 지정되었다.

 

위의 글을 통해 위동항운의 설립 과정과 간략한 연혁을 살필 수 있다. 다만 인천의 문제는 우리 쪽 위동항운 설립에 있어 지역의 해운 관련 업체든 혹은 다른 업체든 한 군데도 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금력이 달렸던 것인지, 영업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인천의 처지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앞마당 인천항을 타지 기업들에게 내주고 인천 업체는 하청업체, 뒤처리 수준으로 전락한 아쉬움을 현역 어느 기자는 매우 뼈아프게 토로한 바 있거니와, 문득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이리하여 인천은 끝내 인천 사람 없는 인천으로 성장하게 된다.”라고 신태범 박사께서 ‥개항 후 인천 풍경…에 탄식처럼 기록하신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넓은 안목으로 볼 때, 인천항이 국제 종합 물류항으로 탈바꿈한 역사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오로지 산업항으로만 줄달음질쳐 오면서 화물 위주의 삭막했던 풍경을 벗어나 비록 중국과만의 정규 항로 개설이었지만, 사람이 오가면서 관광, 문화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항만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국제항 초기 인천항 풍경은 매우 이색적인 것이었다. 당시 인천항을 출항해 산둥성 웨이하이로 향하는 위동항운 카페리 뉴 골든 브리지호를 취재한 1998년 3월17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인천항에서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장수들은 줄잡아 3백여 명. 주로 한국 거주 화교(華僑)들이며, 여자들도 90여 명이나 된다. 취급 상품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서 사들인 의류들과 원단 등으로 모두 중국시장에서 잘 팔리는 물건들이다.

IMF체제로 수출이 더욱 중요해진 요즘, 소리 없는 ¨수출역군〃들인 보따리장수들은 한국 제품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보따리장수들은 중국에 진출한 한중합작공장에 원자재나 주요 기계부품을 조달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곳에서 만난 화교 유광복(劉廣福·54)씨는 ‥주로 위해를 오가는 보따리장수가 200∼300 명…이라며 ‥옷이나 원단을 갖고 들어가 팔고 중국에서는 참깨나 한약재 등 농산물을 갖고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농산물 수입이 자유화되고 금융위기로 원화 환율이 떨어지면서 농산물 수입의 이득이 많이 줄었다.

한때 500여 명에 달하던 보따리장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한 보따리장수는 한중 훼리 한 척이 나갈 때 20억∼30억 원어치가 중국으로 ¨수출〃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최고 500만 원어치를 갖고 나간다는 것.

 

이 기사에서 IMF의 쓰라린 기억과 함께 당시 우리 경제에 적지 않은 보탬을 준 이들 보따리상들의 활약상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중국과의 항로 개설 초기 승객들의 모습을 이색적이라고 썼으나 서해안 시대, 환황해권 시대의 개막이었던 이 사실을 이제 인천항은 지울 수 없는 한 역사로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다소 활기는 줄었으나, 이런 역정을 거쳐 오늘날 인천항은 수평선 넘어 톈진, 친황다오, 잉커우, 다롄, 단둥, 롄윈강, 칭다오, 스다오, 옌타이, 웨이하이 등 중국의 10개 항구를 향해 문을 열고 있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