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휴전 … 1954년 인천판유리공장 건설 재건 신호탄
인천항 수출입 1955년까지 부산항의 10%대 불과 저조
천막없어 장맛비에 양곡 썩어가·수송 화차 부족 지적도
미 항만사령부, 일본인 추방 권한 행사 안해 되레 입국
한국인 대비 일본인 고임금 … 대한노총 임금인상 촉구
휴전감시위원단 출입 항구 지정에 시민 축출 운동 일어나
1954년 유니세프 물자 입 항 … 1959년 부두 복구 기공식도
두 번에 걸쳐 실지(失地)와 회복을 겪으며 무참한 폐허더미 앞에서 망연했던 인천항 사람들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새 삶을 일구기 위해 나선다. 1951년 7월경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으로 우리는 일면 전쟁, 일면 경제 재건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맞는다. 참혹하고 지루했던 전쟁은 일단 여기서 멈춘 것이다. 새 삶, 재건의 첫 땀방울이 1954년 인천판유리공장 건설이었다. 우방과 유엔의 원조에 의한 것들이었지만 방직업도 일으켰다. 당시 국내 4대 기간산업의 하나로 인천과 국가 공업 부흥에 크게 기여했던 것들이다. 특히 화수동의 대한성냥공업사 등 7군데의 성냥공장도 전후 인천의 명물 공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렇게 휴전 후의 인천 산업에 대해 알린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기록은 차라리 감격적이다.
조선업(造船業)도 우리 손에 의해 기지개를 켠다. 전쟁을 겪은 1953년에, 비록 소형선박의 건조와 수리를 주로 하는 규모였으나 인천조선공업주식회사(仁川造船工業株式會社)가 발족하는 것이다. 항도 인천은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공장의 대부분을 부산 일대에 세웠던 일제의 강선조선(鋼船造船) 정책에 때문에 광복 이전부터 인천의 조선공업은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경제 재건에 나서는 중에 정작 인천시민의 큰 터전이었던 인천항의 실정은 어떠했을까.
1953년 이후 휴전이 성립되고 전후 복구기에 들어가면서 인천항의 수출입 규모는 매년 급속한 증가율을 기록하였으나 1955년까지는 수출입 모두 부산항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1956년에 들어 인천항의 수출입 비중이 부산항에 비해 각각 13% 와 23%로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1957년에는 11.3%와 24.3%, 1958년에는 6.6%와 25%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195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도 인천항의 무역 기능은 회복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천광역시사』의 기록이다. 휴전 이후인 1955년까지는 “수출입 모두 부산항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당시 인천항 시설을 보면 더더욱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1953년 7월 15일, 인천항 부두에는 양곡 약 90만 가마가 쌓여 있었는데, 장맛비 속에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이 “첫째 부두시설이 천막 하나 없이 원시적이며, 둘째 수송할 화차량이 부족한 것”이었다는 평화일보의 보도였다. 그런 중에 인천 미 항만사령부에서는 일본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분노케 한다. 1953년 4월 16일자 경향신문은 '선박기술자라는 명목으로 기계공, 전기공, 목공, 기관수 등 일본인 48명이 인천부두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내용을 내보내는 것이다.
이들 일본인에 대하여 지난번 내무부 당국으로부터 추방하라는 시달도 있어 곧 도 경찰국에서는 미 제21항만사령부와 절충하여 오던바 미 당국자로서는 추방의 권한을 행사 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여지껏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며 실업 중에 있는 우리나라 기술자가 허다함에도 불구하고 더욱이나 침략의 원한이 있는 일본인들이 계속하여 입국하고 있는데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도경에서는 이들을 추방한 후에도 작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정도의 만반의 태세로써 20여 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기술공 23명, 전기공 12명, 목공 7명, 갑판원 4명, 중기공 3명을 선택하여 놓고 조속한 시일 내에 미 당국을 통한 해결책만을 요망하는 바이며 모호한 태도로 지내는 미 당국 처사에 일반 시민의 비난의 소리는 자못 높아가고 있다.
우선 이 같은 미군 당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한국 재건과 부흥을 도운다면서도 그들 사고(思考)의 저변에 깔린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무튼 이 기사가 나간 후, 6월에 들어서도 일인 기술자들의 교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모양이다. 대한노총은 일인 교체는 순조로이 진행되어 한국인 선박 기술자들이 취업하고 있다고 발표하나, 노총 산하 인천지구해상연맹은 일인과 한국인 기술자의 임금 격차가 지나치게 큰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서는 실정이었다.
인천항 한국인 기술자들의 노임은 12시간 근무제로 매시간 13환 50전 즉 1일 162환으로 최저생활비도 안 되는 데 비해 일인 노무자들의 노임은 1일 8시간제로 매시간 8불, 1일 평균 56불이였다는 것이다. 일인들은 우리 기술자가 하루 4시간 더 일하고 받은 임금의 약 10배 이상 고임금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6월 16일, 대한노총이 부두노동자 임금인상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다.
또 한 가지, 인천항에 대한 괴소문도 있었기에 적어 본다. 다름 아닌 휴전협정이 조인되면 인천항을 유엔군과 공산군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내용이 휴전협정 이틀 전인 1953년 7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인천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마 중립국휴전감시위원단의 인천 주둔과 관련한 와전이었는지 모른다.
인천항은 중립국휴전감시위원단이 출입하는 지역으로 지정되고 월미도에 체코, 폴란드 등 적성(敵性) 감시위원단이 주둔하면서 시민, 학생들의 축출 시위와 신흥초등학교에서 시민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던 것이다.
1953년 8월에는 인천항에 쌓여 있는 약 4만 톤의 민간업자 고철 때문에 항만 운영의 어려움을 미군 인천항만기지사령부에서 제기한다. 전쟁으로 생긴 고철에 대해 당시 대통령의 수출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나 교통부와 상공부에서 서로 미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니세프(UNICEF)의 어린이 구호물자가 전쟁 후 처음으로 인천항에 입항한 것은 1954년 2월 2일이었다. 이튿날 오후 4시에 인천시청 앞에서 성대한 인수식이 열렸다고 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이 인천항 부두 복구 소식이었다. 1959년 7월30일자 동아일보는 “29일 상오 11시 인천항에서는 현대건설 및 주한 미 육군 극동공병단 주최로 인천항 제1선거 복구공사 기공식이 내외귀빈 참석리에 성대히 거행”되었다는 보도를 내는 것이다. 공사 소요비용은 외화 93만7000불, 한화 5억 환이며, 1960년 12월1일에 준공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완공 후에는 일제 때처럼 “3000톤 내지 4000톤급의 대형 선박의 자유스러운 입항으로 인천항의 하역 능력이 대폭 증가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희망을 비친다.
6·25로 인해 인천항은 갑문비·호안·창고 등이 파괴되어 하역 능력 130만t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으나 1954년에 90만t으로 복구한 데 이어, 이렇게 동아일보의 '기대'대로 1961년부터 130만t을 회복하는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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