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단순하게

새해 아침이 밝았다. 한 해의 마지막날을 전후해 톡톡 들어오는 문자메시지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엔 행복하시길 바란다는 축복의 말로 넘쳐난다.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친구들이 보내는 새해인사에는 축복의 성경말씀 구절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일반인 친구들의 경우에는 한해동안 수고 많았으니 새해에는 행복만 가득하길 빈다는 덕담이다. 행복하길 원하고 축복하는 것에 누가 반대할까마는 행복한 것에 대한 답이 확실하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행복하다” 에 대한 풀이는 형용사이고, 삶에서 기쁘고 즐거우며 그리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표시한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조건은 누구에게나 동일한가? 만족스럽다는 정도는 과연 절대적인 수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수많은 판단과 해석이 가능할 ‘행복하다’는 정의와 관련해서 새해 첫날 난 미국에 있는 막내아들과 논쟁을 벌였다.

사실 아이 셋 중에 가장 총명하다 여겼던 막내는 비교적 내 사랑을 많이 받았다. 생김새 뿐 아니라 말솜씨도 여간 뛰어난 게 아니어서, 그를 어려서부터 아는 사람들은 마치도 변호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데 별안간 음악을 하겠다고 고등학교 1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나와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고등학교는 마치고 나서 뭘 하겠다고 그래야지 무슨 얼토당찮은 말인가. 듣기에 편하지 않은 멜로디에다, 아니 원래 랩rap 이란게 내 취향은 아니지만, 노래가사도 영 불편한 것이 어찌 그리 욕설이 난무한가 말이다. 결국 대학가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면서 그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에 난 더 이상의 강요를 못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야지 엄마라고 어찌할텐가.

그랬던 아들과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를 나누면서 올해는 어떤 계획이 있는가를 물었는데, 천연덕스럽게 자기는 지금 파트타임 일하는 것에 만족하고 여전히 음악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거였다. 이젠 정신차리고 공부를 하고 더 나은 직업을 찾았으면 좋겠다 말하는 나를 향해, 모든 직업은 그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고소득 직업을 위한 학교공부가 필요한 시대는 지나갔다는 주장과 함께 지나치게 편파적 부를 초래한 자본주의Capitalism를 비난하면서, 기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엄마 세대의 행복이란 것이 자신의 행복 관념과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라는 주장으로 나를 어이없게 했다. 전화를 마치고나서 난 한동안 먹먹했다. 힘들게 이겨내야 하는 이 삶의 전쟁터에 막 발을 내딛고 나선 아들의 ‘행복’이라는 이해가 나의 것과 사뭇 다른데 그 차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 지. 그의 행복이 오래 지속될 근거가 내겐 너무 부족해 보이고 철없음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본인의 삶을 잘 다지기를 바라는 내게 무슨 사회주의적 낭만을 얘기하는지. 세상이 달라졌다손 쳐도 엄마로서 아들에게 가진 기본적인 교육에의 바램이 무참하게 엄마의 욕심이라고 칭해졌다.

물질적인 잣대로 행복을 가늠할 수 없음은 나도 안다. 제각각 환경에서 비교의식이 제외된 만족을 가짐이 행복이라면, 거기엔 경쟁, 시기, 교만, 불평이 아닌 이해, 배려, 겸손, 감사가 충분요소로 있을 터이다. 야망과 소망이 구별되어져야 하듯, 배움을 목표한 교육이 자본주의적 결과와 연계되어질 이유가 없는데, 이 아들은 자신만의 이유를 두른채 엄마를 아프게 한다. 정말.

2021년, 여전히 코로나로 세상이 어지러운 중에 난 간편한 다짐을 한다. 모태로부터 가진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는 말씀을 삶의 기본으로 삼고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 사랑을 나도 일상에서 비출 수 있기를 빌면서, 행복하다는 것에 단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새해는 다시 조심스러운 시작을 밝혔다. 모두에게 2021 Happy New Year!

 

/Stacey Kim 시민기자 staceykim6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