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에서 9단은 `입신(入神)'으로 불린다.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둑 사관학교 격인 연구생제도가 정착된 뒤 탄탄한 기량을 갖춘 입단자(초단)들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초단이 9단을 이기는 경우가 빈번해 오히려 `9단이 초단을 이기면 이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초단은 `수졸(守拙)'이라고 하는데, 겨우 자기 집이나 지킬 정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집에 머물지 않고 밖에 나가 신을 이기니 이보다 더한 반전은 없다.

이번 4·15총선은 정치 9단들의 무덤이 됐다. 정치권 막전막후를 주름잡으며 일찍이 정치 9단 반열에 올랐던 박지원 의원은 전남 목포에서 정치신예인 김원이 후보에게 적지않은 표차로 패배했다. `여의도 족집게'답게 열세를 직감한 박지원은 자신이 민생당 후보임에도 “박지원이 문재인, 박지원이 민주당”이라며 아스팔트에서 큰절을 올렸지만 유권자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또 다른 정치 9단인 천정배 의원은 7선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고, 2007년 대선 후보까지 지낸 정동영 의원은 5선 길목에서 쓴맛을 봤다. 정동영(전북 전주)과 천정배(광주 서구)는 자신의 텃밭에서 무명에 가까운 민주당 후보에서 완패당했다. 현역 최다선(8선)인 서청원 의원도 9선에 실패했으며, 5선인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역시 자신을 키워준 경기 안양에서 외면받았다. 이 외에도 9단이 초단급에게 패한 경우는 헤아릴 수 없다.

나이도 나이지만 정치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이들 중 상당수는 정가를 떠날 것으로 전망됐지만 사정은 딴판이다. 손학규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은 “내게 아직 건강이 있고 새롭고 왕성한 정신이 있다”며 정치활동 연장 의지를 드러냈다. 정동영은 투표일 직전 “이번 총선이 마지막 선거”라고 배수진을 쳤으나,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는 “(향후 진로는) 천천히 생각하겠다”며 말을 바꿨다.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가 다시 앞마당으로 나서는 것이 정치인이지만,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여 선뜻 정계은퇴를 선언한 사람이 없다. 천정배는 “2년 뒤 호남대통령 못 만들면 정계은퇴하겠다”고 했지만 `2년 뒤'라는 토를 달아 하나마나한 말이 됐다.

9단은 9단다워야 한다. 바둑 9단은 비록 기술에서는 밀려도 품격은 유지해 후진들이 어려워 한다.

하지만 정치 9단은 어떤가. 귀감이 되기보다는 노회함와 변신의 처세술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우리나라 정치가 `3류'로 불리며 비난의 대상이 된 데는 누구보다 9단들의 책임이 크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