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해상실크로드의 중심 '경기만'] 2. 산둥 덩저우 vs 화성 당성, 고대 황해를 주름잡던 요충지
▲ 고대 황해 바닷길의 출발점인 산둥 덩저우의 펑라이고성 .
▲ 화성 당성 입구에 설치된 당성사적비의 모습.
▲ 중국 덩저우항의 현재 모습.
▲ 중국 청샨터우(成山頭)의 불로약을 찾아 떠난 서복이 진시황과 이사에게 설명하는 모습.

고대 '발해항로' 따라 교역 기록
제나라 '고조선 문피' 최고 인정

中 산둥 덩저우 고구려·발해로 가는 길 출발지
진시황 불사약 찾으러 서복보내
한무제 신선 되고자 소원 빈 곳
펑라이고성 외구 막고자 지어

한반도 당은포
中 가는 거점항구 … 황해 요충지
신라 등 차지한 국가 황해 장악
구봉산 정상에 '삼국시대 성곽'
조사결과 고대 당성이었음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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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중국은 고대부터 황해를 왕래하며 교역하였다.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기록은 <관자(管子)>에 보인다.
이 책은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인 관중(管仲)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관자가 제나라 환공이 궁금해 하는 7가지 '옥폐(玉幣)'를 알려주는 부분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발조선(發朝鮮)의 문피(文皮)'이다.
'문피'는 호랑이나 표범 가죽을 말한다.
고대에도 문피는 귀한 보물이었으며 고조선의 것을 최고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나라는 산둥성에 위치하였고 고조선은 보하이(渤海)만과 랴우둥(遼東)반도 위쪽에 있었다.

두 나라가 이러한 특산품을 교역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두 나라가 상호 왕래한 바닷길은 보하이만을 따라가는 발해항로(渤海航路)였다.

이는 육지를 따라 가는 연안항로로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가장 안전한 항로였다.

산둥(山東)성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는 어디였을까. <신당서>에 그 답이 보인다. 바닷길로 고구려와 발해가는 길을 기록했는데, 그 출발지는 덩저우(登州, 등주)다. 즉, 덩저우가 고대부터 중요한 항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덩저우는 펑라이(蓬萊)로 바뀌어 산둥성 동북단에 있지만, 고대에는 산둥반도 동쪽지역 전체를 가리켰다. 고대 중국인들은 해가 솟아나는 동쪽에 신선이 산다고 믿었다.

그리고 황제들은 모두 신선이 되고 싶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바다 건너에 있는 불사약을 찾기 위해 서복(徐福)을 보낸 곳이 이곳이며, 한 무제도 신선이 되고자 이곳에서 동방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이처럼 덩저우는 고대로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가는 출구이자 황해를 오가는 중요 항구로 자리매김했다.

탐사팀이 고대의 등주였던 펑라이를 찾았을 때 바다는 해무로 가득했다. 펑라이는 옛날부터 영주, 방장과 함께 바다 속 삼신산이 있는 곳이라고 여겨왔다.

또한 여덟 명의 신선이 바다 속에 있는 삼신산으로 건너갔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매년 봄이면 바다의 신기루가 펼쳐지는 까닭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생긴 것인데, 이를 본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 또한 회랑에 가득하다.

단애를 오르내리는 해무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펑라이고성은 바다 너머에 있는 신선의 세계로 가는 입구에 왔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지금의 펑라이고성은 명나라 때 빈번한 외구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펑라이'라는 지명도 수성을 쌓으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펑라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청샨터우(成山頭)에 도달한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자,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이 불노장생약을 얻기 위해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난 곳이다. 이를 알려주려는 듯, 진시황과 이사에게 동쪽 바다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서복상이 보인다. 그 옆 광장에는 한 무제 일행이 제를 올리는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이 광장을 메우고 있다.

진시황의 순례행렬을 표현한 조형물은 해무 속에 찾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돈벌이하기에 바쁘다.

고대의 한반도에서 황해를 왕래하는 주요 항구는 당은포(唐恩浦)가 우선이다.

당은포는 <신당서>에 신라를 가는 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배를 타고 보하이만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의 당은포구에 도착한 후, 육로를 이용하여 동남쪽으로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王城)인 경주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한반도의 당은포가 중국의 덩저우에 대응하는 황해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은포는 어디일까? 조선시대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양도호부'조항을 보면, 백제시대에는 당항성(唐項城), 삼국시대에는 당성군(唐城郡),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은군(唐恩郡), 고려시대에는 남양부(南陽府)였다고 하였다. 즉, 남양도호부가 고대의 당은포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남양도호부는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이다.

이곳의 구봉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의 성곽이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고대의 당성(唐城)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백제 토기와 중국의 자기가 다수 발굴되었는데, 이는 고대부터 이곳이 대중국 교역기지의 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종3품 부사가 관리하는 도호부였다는 것은 이곳의 중요성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당은포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서로가 차지하려고 다퉜으며, 이곳을 차지한 국가가 황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당은포는 한반도 황해의 요충지이자 중국으로 나아가는 거점항구였던 셈이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는 400년간 당은포를 차지하였다. 신라가 당은포를 오랫동안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중앙정부 차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화성 당성유적지에서 신라의 6부 중 하나인 본피모(本彼謨)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중앙정부 차원에서 직접 당은포를 관리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반도 동쪽 구석에 있는 신라. 그러한 신라에게 있어서 당은포는 중국으로 나가는 통로를 마련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는 숨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당은포는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

당은포가 있었던 남양만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의 기반이 된 곳이기도 하다. 홍씨는 당나라에서 보내온 8명의 재사(才士) 중 한 명이었다. 왕건이 건국할 때에 홍은열이라는 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왕건은 이곳을 하사하고 대대로 귀족이 되게 하였다. 또한, 원효가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구법의 길을 떠날 때 배를 타려고 했던 곳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부사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당은포의 쇠퇴는 고려를 세운 왕건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해상무역의 중심기지로 활성화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당은포는 이후에도 교통로의 요충지였기에 주요 항구로서 이용되었고, 천혜의 자연조건 덕택에 조선시대까지 군사기지로서 활용되었다.

대로부터 바다를 장악하는 국가가 패권국이 되었다. 특히, 황해와 보하이만은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에 시대마다 이 곳의 제해권(制海權)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이 있어왔다. 맨 처음 이곳의 바다를 장악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뒤이어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장악하며 수륙강국의 시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수당전쟁을 거치며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제해권은 당나라로 넘어갔다. 고려시대 황해를 주름잡던 상선들도 조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황해에서의 제해권을 잃게 되었다.

▲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