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인천예총 사무처장
▲ 김학균 인천예총 사무처장

지역의 대표를 뽑는 제20대 국회의원선거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중앙은 물론 지역 정가가 온통 시끌법석하다, 대표하기는 무엇일까. 여지껏 실망만 쏟아놓는 그것, 대표하기 말고 진정한 대표하기를 빈다. 대표하기란 진짜 무엇일까? 바로 '재현'한다는 것 아닐까.

금년 1월인가 몇몇 위원들을 모아놓고 '계양대교'의 자살방지에 관한 토의를 한 적이 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자살하는 횟수가 빈번해 그 방지책이 시급하다고 해당 지자체에서 묘안을 내기에 골몰하고 있다.

위로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거나 슬픔을 달래준다"라고 돼 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사전적 의미는 무엇이며 과연 말과 행동이 괴로움과 슬픔을 가진 자를 달래줄 수 있는 것일까?

2012년 자살방지 캠페인을 벌이며 서울시와 삼성생명이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를 한 내용을 보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글귀들이 마포대교 난간에 표시돼 있다.

"밥은 먹었어?"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꾹꾹 참은 이야기 한번 털어 놔봐요" "인생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긴 다리를 건너면 겨울 지나듯 새 봄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괴로움과 자살에 이르게 하는 슬픔을 달래 주었을까? 캠페인을 벌여 투신자를 줄여보고자 했던 목적과는 다르게 늘어만 갔다는 결론으로 해외 유수의 광고경연에서 상을 받은 것을 무색케 하는 위로가 독이 돼온 역효과가 분명하다.

왜 굳이 대교들을 찾아 투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기도 괴로운 일이나 다만 '위로'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직접' 해주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 아닐까, 서로를 땀 냄새 나도록 꼬옥 부둥켜안고 '그래' '그래'를 반복하며 등 두드려 주며 괴로움과 슬픔을 쓰다듬는 존중의 미를 발휘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몸과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말,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재현'이다.

'상처받는 사람들'의 역할을 자기 것으로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뽑힌 자들의 몫이 아닐까.

구약성서의 욥기에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각각 3번의 욥을 위로한다며 재산과 자식을 잃고 병에 걸린 그를 찾아 모든 게 너의 잘못이라 벌을 받고 용서를 빌어 정직함을 인정받으라 그리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결코 위로 아닌 탓으로 훈계만을 늘어놓은 전례와 교리의 자기주장만을 내세운 위선이었다.

진정한 친구의 부재 그리고 늘 혼자인 자기를 확인시키기 위한 투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십)m 높이의 다리 위에 서서 위로를 듣는 것도 아닐 뿐더러 눈으로 잃어야 하는 위로의 문구는 투신자의 더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닐까?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이 돼서는 정말 안 될 일이다.

자타간 위로하는 사람들로 구분돼진 것이 아니라 자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 네가 아니고 나이며 고통의 근원을 진정 없애주는 구약의 '욥기'가 돼야 할 것이다.

도시를 천천히 만지며 걷다보면 명언을 적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와 닿았다가 순간 사라지는 봄 같은 말, 말에 마음 베이는 문구보다 가슴에 꼭꼭 진솔하게 침전되는 말과 웃는 얼굴이 필요할 때다.

웃으며 꼬집는 짓은 아픔도 있거니와 마음까지 상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열한 짓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한 사람과 사랑을 받은 사람 중 '사랑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성장을 하고 언어를 갖게 된다는 말이 봄기운처럼 번지면 좋겠다. /김학균 인천예총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