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선친께서 양철로 만든 둥근 통을 갖고 들어오실 때는 눈이 뻔뜩거렸다. 씹어 먹으면 과자처럼 바삭거렸고 빨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달달함이 남아 있던 각설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주사위 크기만한 하얀 결정체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도 신기했지만, 눈깔사탕보다도 잘 녹았고 끈적거림이 덜해 호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들러붙지 않았었다.

어느 날. 비슷한 양철통이지만 왠지 달라 보이는 통이 있어 열어보니 거무튀튀하게 생긴 것이 각설탕 모양을 닮았지만, 혐오스런 낯빛에 냄새마저 퀴퀴한 것이 들어있었다. 단맛 도는 것 같으면서도 쓴맛이 입안을 감싸는 것이 '어린 것'들이 먹어서는 안 될 거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됐다.

청소년의 티를 벗어 던질 무렵,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인천과의 지리적 여건상, 사건에 대한 소문과 풍문들은 전단지처럼 산발적이고 격하게 전해졌다. 당시 인천에서 발간된 매체의 거반은 삭제되기도 하고 오보라는 이름으로 걸러지고 있었다. '

이 때부터 '생소함'이란 이름으로 대중들을 향해 펼쳐진 일련의 이벤트들에는 '우여곡절'이란 별명이 나붙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며 안소영의 애마부인이 파격적인 모습으로 또래들의 감성을 자극했고, 급기야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돼 몇 시간이고 콘크리트로 만든 쓰레기 통 뒤에 숨어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심야활보의 로망이라 불리던 24시간 카페의 등장으로 거리는 어둠의 테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됐다. 진작부터 커피전문점이란 간판이 백주의 왕자로 군림해 다방 내지는 각종 끽다점(喫茶店)들을 위협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비처럼 발랄했던 시절. 그러나 그 날갯짓에 이는 바람에도 현실의 저변부들은 한 꺼풀 씩 쉽사리 까발려졌다. 학비는 물론 자잘한 용돈까지 부모님께 손 내미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됐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찾아든 다방 '짐Jim'의 문은 가뿐하게 열렸다. 클래식 LP판을 틀어주며 짬짬이 공부하면 될 거라는 생각과 한 달 5만 원이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다 싶은 기대감은 폐부에 잔뜩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난생 처음 접하는 클래식, 더군다나 신청곡 음반을 찾으려면 일일이 위치를 파악해 선별해야 했고, 턴테이블에 올려 마이크까지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보면,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가버린 하루였었다. 그 때 주방 아주머니와 '레지'라 놀림 받던 수정 씨가 작은 구멍으로 이따금씩 디밀어 주던 커피는 어리바리했던 오후를 단도리해주는 월아천(月牙泉) 샘물과도 같았었다.

현재 인구 300만에 육박하는 인천인 주변에 커피와 관련된 업체 수가 2000개를 넘어선다는 통계다.

인천의 행정과 생활경제의 중심지였던 원도심만 해도 80여 곳의 커피집들이 마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전국적으로 연 30%의 증가율과 28%의 폐업이 부침의 순환 고리를 이룬다하니, 30여 년 전의 현상과 다를 바 없이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17세기 초 유럽 전역에 퍼진 것부터, 19세기 후반 인천발(發) 전국적 신드롬을 일으킨 '가배'의 배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으리란 짐작이다.

당대의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그 사정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1920년대 풍속도를 지배했던 고급 커피문화의 대중화 바람이나, 한국전쟁 이후 들어 닥친 미국발 커피문화의 그것 등을 고려했을 때, 오늘날 못지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커피의 쓴맛과 삶의 연륜과의 함수관계를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인천에서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녹록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를 뭉뚱그려 '총체적 쓴맛'이라 하면 선배제현들께 꾸지람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연유로 베트남 북부 하노이시, 어느 외곽 길거리에 앉아 우리 돈 13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흘러넘치듯 쏟아져 흐르는 중국인들을 씁쓸 달콤하게 바라보는 여유를 챙겨보기도 했었다.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불호령 떨어졌을지도 모를, 턱없이 비쌌던 멜랑쥐(Melange) 한 잔을 입 안에 털어 넣듯 마셔버린 기억은 여전히 아들과의 입담이 됐다.

1만70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오스트리아 빈 거리를 헤맨 데에는, 비엔나에 왔으니 비엔나커피를 마셔보자며 곳곳의 메뉴판을 뒤적거리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으나 그 어디에도 그런 커피는 부재했다. 좌충우돌 끝에 멜랑쥐라는 이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비엔나커피라는 것도 필자의 커피 혹애사의 일부가 됐다.

여하간, 커피는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교감을 갖고 있다. 유년기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필자가 체험한 것에 긍부(肯否)의 이설은 있을지언정, 우리 생활의 노곤함 한자리에 머리 기대어 봄직한 드렁칡처럼 확실한 자리를 꿰찬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