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애향·자긍심 고취시키다
1965년 자유공원 광장서 제1회 성대히 열려 … 화교·미군도 초청
1968년 항도제 겸해 치르다 이듬해 행사 통합 '제물포제' 개칭
▲ 60년대 말부터 인천시민의 날은 '제물포제'라는 명칭으로 치러졌다. 시내 거리에 세워진 축하기념탑의(왼쪽) 모습과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광경.

1965년 시정자문위원회는 인천의 애향심을 고취하고 온 시민이 다 같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시민의 날 제정에 나선다. 인천과 관련한 '유서 깊은 날' 중에서 택일하기로 하고 조사에 나섰다.

위원회가 고른 날은 '인천의 개항일'이었다. 인천이 개항한 공식적인 일자는 1883년 '1월1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시민들이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춥고 무엇보다 연초이기 때문에 모두들 바쁜 때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참고한 것이 일본인에 의해 편찬된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이었다. 그 책에 의하면 인천항의 실질적인 개항은 1883년 6월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를 적용해 '6월 1일'을 시민의 날로 정하게 되었다.

1965년 제1회 인천시민의 날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자유공원 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평의 에스캄부대 미군들과 인천거주 화교들도 초청되었다. 축하잔치는 이날 밤 8시부터 9시30분까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시민위안의 밤'으로 진행됐다.

'국내 베테랑급 가수인 현미, 한명숙, 박제란, 최희준 등이 출연해 그칠 줄 모르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라고 한 지역신문은 그 날의 풍경을 전했다.

시민의 날은 상공계의 제안에 따라 1968년 제4회 때부터는 항도제(港都祭)를 겸해서 치르다가 이듬해부터 두 행사를 통합해 '제물포제'라 개칭했다. 제물포제는 1974년부터 동양최대 도크식 인천항 갑문 준공일인 5월10일로 변경돼 치렀다.

인천시는 1981년 7월1일을 기해 경기도로부터 분리돼 인천직할시가 되었다. 직할시 승격을 기념해 이 날을 시민의 날로 다시 제정했다.

공설운동장에 3만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구청대항체육대회, 시민위안잔치, 주부백일장, 꽃버스운행, 시가지 가장행렬 등 대규모 경축행사를 열었다.

문제는 7월1일이 계절적으로 장마 시즌이라는 점이었다. 매년 폭염과 폭우로 인해 행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1993년 시사편찬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날짜 변경이 논의되었다.

이듬해 인천시는 시민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인천상륙작전기념일(9월15일), 인천항 개항일(2월27일), 경인선 개통일(9월18일) 등 중에서 인주(仁州)를 '인천'으로 개칭한 날(10월15일)을 시민의 날로 다시 택하게 된다.

조선 태종 13년(1413) 군이나 현에 주(州) 자가 들어있는 고을은 산(山) 자나 천(川) 자로 고치게 했는데 이때 '인천'이 탄생했다.

지난 2013년은 '인천'이란 명칭으로 불린 지 60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인천정명(定名) 600년' 기념사업과 행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올해 시민의 날은 그 어느 해 못지않게 의미가 크다. 10월15일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문학산이 50여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군부대가 주둔하기 위해 1959년 시설공사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문학산 정상부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이곳은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미군 방공포대가 주둔했고, 그 이후에는 우리나라 공군부대가 사용했다.

문학산 군부대는 2011년 병력을 철수했고 현재 막사 등 12개 동의 시설과 무인중계기 등 장비만 남아 있다.

비록 '조건부 전면 개방'이지만 2015년 시민의 날을 기점으로 인천의 정신과 뿌리가 담겨있는 문학산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끝>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