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49>권번(券番) 성립 이전, 청나라 조계의 주루(酒樓) 풍경
 조선총독부가 '창기단속령(1908년)'를 발표하자 모든 기생들은 기예의 유무와 상관없이 '권번'에 기적(妓籍)을 두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기생조합(妓生組合)의 일본식 명칭으로 직업적인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이면서 기생의 활동을 관리하던 조합이다. 권번은 기생들이 손님에게 받은 화대(花代)를 관리했고, 기생들의 세금을 정부에 바치는 중간 역할까지 맡았다.

 권번이 성립되기 이전 인천의 요릿집, 혹은 주루의 모습을 전하는 자료는 흔하지 않다. 다만 『인천잡시(仁川雜詩)』(1893년)를 통해 청나라 조계의 주루 풍경 확인할 수 있다.
 
 靑樓 청루
 樓樓絲竹寂無聲(누루사죽적무성) 누각마다 악기 소리 끊겨 고요한데
 炙冷杯殘欲五更(자냉배잔욕오경) 구운 고기는 식었고 잔만 남겨져 오경(五更)에 이르렀네
 鬢影映簾時有語(빈영영렴시유어) 그림자 주렴에 비치고 때마침 말소리 들려오니
 鴛鴦相約向京城(원앙상약향경성) 원앙은 경성에 함께 갈 것을 서로 약속하네
 
 同曰 聞頃仁川第一佳人 爲某生所購 至京城 不知詩中所言得乃無非此乎
 또 말하길, 근자에 인천의 제일 가인(佳人)이 어떤 사람에게 팔려 경성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시에서 말한 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일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絃歌聲湧興方闌(현가성용흥방란) 거문고 노랫소리 드높고 흥이 한창 무르익자
 妖紅艶黛紛一團(요홍염대분일단) 요염한 여인들이 어지러이 엉켜있네
 海賈時時博奇利(해가시시박기리) 바다 장사꾼들은 때때로 뜻밖의 이득을 얻어
 豪遊來試肉臺盤(호유래시육대반) 호화롭게 놀면서 속물적인 연회를 벌이네
 
 同曰 此景往往而有之
 또 말하길, 이러한 광경이 왕왕 있었다.
 
 美人樓上酒如澠(미인루상주여민) 누각의 미인에겐 술은 눈물과 같고
 歌捲絃殘興彌增(가권현잔흥미증) 노래 끝나고 거문고 소리 잦아들지만 흥은 더욱 높아지네
 知否街頭風捲雪(지부가두풍권설) 길거리 바람이 눈을 말아 날리는 거 아는지 모르는지
 春深紅帳一枝燈(춘심홍장일지등) 무르익은 봄날 붉은 장막 속의 한 줄기 등불이어라
 
 첫 번째 한시에는 술자리가 오경(五更, 새벽 4시) 무렵에 끝났다는 점과 취객(醉客)들이 기생들에게 경성 구경을 함께 가자며 수작을 걸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두 번째 한시를 통해 뜻밖의 이익을 얻은 장사꾼이 기생들과 질펀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어지럽게 엉켜서 속물적인 연회를 벌인다는 표현에서 질펀함을 넘어서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광경이 왕왕 있었다'는 마쓰모도의 단평은 '뜻밖의 이득'과 관련된 게 아니라 질펀한 술자리의 모습과 관련된 것이다.
 
 美人樓上酒如澠(미인루상주여민) 누각의 미인에겐 술은 눈물과 같고
 歌捲絃殘興彌增(가권현잔흥미증) 노래 끝나고 거문고 소리 잦아들지만 흥은 더욱 높아지네
 知否街頭風捲雪(지부가두풍권설) 길거리 바람이 눈을 말아 날리는 거 아는지 모르는지
 春深紅帳一枝燈(춘심홍장일지등) 무르익은 봄날 붉은 장막 속의 한 줄기 등불이어라
 
 
 세 번째 한시에는 청루 소속 기생들의 애환이 나타나 있다. 기생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이다. 한바탕 부는 바람에 여기저기로 떠밀려 날리는 길거리 눈[雪]의 처지와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청루의 기생을 의미하는 눈[雪]은 다음 행에 '무르익은 봄날(春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꽃잎이나 꽃가루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람에 의해 여기저기로 날리는 꽃잎이나 꽃가루는 해당 시기만 지나면 사라지고 눈[雪] 또한 '무르익은 봄날(春深)'에 녹아서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들을 통해 청루의 기생을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루가 위치한 곳은 청나라 조계지역이다. 조계(租界)는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해당 국가가 행사하는 지역을 말한다. 조선은 1883년 8월 <인천구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을 체결하여 지금의 중구청 일대를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하였다. 이후 1884년에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이 체결되자 지금의 선린동 일대에 청나라의 조계가 들어섰다.

 청일전쟁(1894)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하기 전까지 청나라 상인들이 인천에 상주하며 인천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했는데, 이때 인천전환국 기사로 와 있던 요코세 후미오(橫瀨文彦)가 활황을 이루던 청루를 방문하고 느낀 것을 한시 형태로 남긴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