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산곡동-질곡의 외세풍(風)돌고 돈 백마장
美 조병창 접수후 애스컴 자리잡아
백마장 주변 양키문화 융성도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위해 부평벌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만들었고 패전 후 그들이 떠난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일대는 기지촌이 되었다. 철마산 밑에서 한가롭게 농사짓고 살던 백마장에는 왜색풍이 불다가 다시 양키문화가 불어 닥쳤다.
이제 한 세대가 지나갔지만 옛 조병창 땅은 아직 우리 품에 안기지 못하고 부평벌 곳곳에는 여전히 식민 통치와 미군 주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평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미군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을 얘기할 때마다 귀를 쫑긋하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안에 인천항 까지 연결된 지하 터널과 거대한 보물 창고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있을까. 최근 그 '사실'에 대해 공식적인 증언자들이 나왔다.
"예전에 부대에 근무했던 부친으로부터 땅굴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7년 전 부대 내 정문 옆 주차장 부근과 좌측 옛 빵공장 부지 등에서 땅굴 6곳을 발견했다. 땅굴로 내려가는 길은 폭과 높이가 2미터 정도 됐으며 7m쯤 내려간 곳에 물이 가득 차있어 더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바닥엔 무기 수송을 위한 철도 레일이 깔려 있었다."
땅굴과 관련해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대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연못의 깊이가 시시때때로 달랐고 한다. 바다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썰물 때와 밀물 때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못에서 멱을 감다 실종되었는데 한참 후에 인천 앞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는 괴담도 나돌았다.
1986년 4월 이 동네에서는 한바탕 '보물찾기'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말 포탄 등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제가 조선 팔도는 물론 중국, 만주, 대만 등에서 강제로 공출해 온 동·철제품이 일본군 병기제조공장 터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있던 공공기관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땅속에서 화폐 등이 쏟아져 나왔고 인근 주민과 화폐수집가·고물상 등 하루 500여명이 몰려들었다. 출토된 물건은 청조 때 통용되던 황동 동전과 중화민국 개국기념 화폐를 비롯해 칼, 놋그릇, 수저 등이었다. 드물게 우리나라의 상평통보와 청동불상 등도 나왔다. 많이 캔 사람은 혼자서 1000점 이상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보물창고'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아 1990년대 말 한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발굴 조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이곳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들이 종사했다. 조병창에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해주는 특혜 때문에 이곳을 피난처로 삼고자 많은 외지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간혹 일본 요인 암살용 혹은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 공급하기 위해 이곳에서 무기를 몰래 빼내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패망 후 미군이 이곳을 접수하자 사람들은 그 안이 몹시 궁금했다. 특히 창고에 저장돼 있는 물자의 양이 궁금했다. 1946년 1월 25일자 대중일보를 보자. "인천 공업인들이 1돈에 2500원을 줘도 입수하기 힘든 코크가 무려 5000돈이나 쌓여 있고 어떤 공장에서든지 필요한 스패너가 약 20 화차분이나 쌓여 있으며 철재를 비롯한 군수품이 산적해 있다."
실제로 당시 국내에서 1년에 3000t이면 충분한 고무 원료가 조병창에서 1만 톤이나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고무제품 가격이 급락했고 특히 고무신 값이 7·80원 정도 '왕창' 하락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병창 인근에 군수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5개의 일본인 토건하청업체를 참여시켰다. 이 중 간또오구미(關東組)라는 업체는 백마장 일대의 공사를 맡았고 근로보국대에 편성된 조선인들이 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근로자들을 위해 판자로 만든 집들이 길게 들어섰다. 지금의 산곡동 롯데마트 인근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관동조'라고 불렀다. 미군이 부평에 주둔하면서 관동조 동네는 양색시촌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후에 다시 미군이 떠나자 한국인을 상대하는 집창촌으로 변했다가 현재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 집들은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인천시는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품고 있는 이 주택단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제가 쫓겨난 후 그 자리에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조병창을 접수하고 남한 지역에 주둔한 미군들의 주요한 보급기지인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애스컴 주변에는 다양한 미군 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초 현재의 현대아파트 3단지 자리에 국내에서 제일 큰 121미군후송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시설과 의료진이 좋아 당시 유력 정치인들은 물론 대통령도 치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이 병원이 세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었다. 사건 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승무원들은 바로 이 121병원으로 후송돼 하루 동안 묵으며 검진을 받았다. 별 넷 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에 근무하는 모든 미군 장성들이 사이드카와 소방차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고 외신기자와 국내기자의 취재 열기로 백마장 일대는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후방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은 헬리콥터로 날랐다. 지금의 한화아파트(조선베아링) 자리에 항공부대가 있었고 금호아파트와 한양아파트 사이 큰길 마장로에 활주로가 길게 놓였다. 하루 종일 헬리콥터와 프로펠러 경비행기들이 오르내렸다.
부평에 미군과 미제물건이 들어오면서 양키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백마장 골목에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들이 문을 열었고 주말이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 미군헌병들이 자주 순찰을 돌았지만 미군끼리, 미군과 한국인이 심심치 않게 싸움판을 벌이곤 했다. 가끔 기지촌 여성의 살인사건이 신문 귀퉁이를 장식하곤 했다. 급기야 부대 인근에 미군 형무소가 생기기도 했다. 미군형무소는 19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고 이후 그 자리에 문화주택이 세워졌다.
골목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집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연합병원과 모자병원이 문을 열었는데 양색시들의 보건증 발급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철마산 아래에는 혼혈아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동네가 험하고 거칠어졌지만 미군 덕분에 돈은 잘 돌았다. 구멍가게에서도 달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백마장 경기는 좋았다.
부평은 한때 '미군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평 미군부대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62년 6월17일에 재건된 외기노조 부평지부 조합원의 수가 3166명(남 2900명 여 266명)인 것을 감안하면 4000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코 사그라질 것 같지 않던 미군 경기는 1970년대 들면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미군 철수가 현실이 되면서 급기야 1972년 12월 중순 부평 애스컴부대 한인종업원 416명은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백마장에서는 미군과 군속 그리고 양색시들의 그림자가 점점 사라졌다.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곳
현재의 부평롯데백화점(옛 동아백화점) 앞 원통천 복개변 개울가 일대를 흔히 '다다구미'라고 불렀다. 조병창 공사 하청업체 다다구미(多田組)의 현장 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현장 사무소가 철수하면서 빈터로 남아 있었다가 무허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마을 이름을 '평화촌'이라고 명명했는데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지금의 부평 2동 일대를 '홍중(히로나까)사택'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부평공원 자리에 홍중(弘中)이란 군수공장이 있었고 종업원 사택이 부평2동에 수십 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이후 히로나까 공장이 미쓰비시(三菱)로 바뀌면서 사택 이름도 '미쓰비시 사택' 혹은 '삼능사택'으로 바뀌었다.
백마장 인근에는 버스정류소 이름으로도 유명한 '화랑농장'이 들어섰다. 1952년 무의탁 상이군인들이 양계를 하며 개척하기 시작했고 한미재단의 건축자재 원조와 미 8057부대의 지원으로 1955년 3월 '화랑농장'이란 간판을 달았다. 거주자들을 위한 35평 대지에 18평 건평의 주택 120동 정도가 세워졌다. 일률적으로 빨간 벽돌에 파란 지붕을 얹은 집들이었다. 농장으로 시작했지만 후에 간장공장도 세워졌기 때문에 근처에 가면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에는 서울 중랑천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는 등 또 다른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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