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6 『조선미술사』 (상)"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해 울려지나니"
   
▲ 1938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佛國寺と石窟庵』 朝鮮寶物古蹟圖錄 第一(『불국사와 석굴암』 조선보물고적도록 제1)에 실린 사진과 도판(아래). 일제가 1912~1915년 대규모 보수공사를 벌이기 전에 촬영한 석굴암 모습이다.


청년시절 민족 존망 염려

조선인 미의식·가치 규명

'필생 기획'으로 자리잡아


사후 황수영·진홍섭 주도

스승의 미발표 유고 모아

학문적 성과 집대성·출판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는 안 될 작품으로 경주의 석굴암(石窟庵)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섹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 <「내 자랑과 내 보배, 우리의 美術과 工藝」『동아일보』, 1934.>

 

   
▲ 석굴암 전실과 주실의 인왕상과 사천왕상, 보살과 제자상 등의 배치 도판1.


▲ 시대가 요청한 학문
잘 아디시피 우현 고유섭은 '조선미술사' 쓰기를 소망했다. 그가 남긴 일기나 글 가운데서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현이 무슨 동기에서 왜 조선미술사를 쓰고자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미학자 이인범은 "일제 식민체제가 굳어가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궁핍하기 이를 데 없던 시절, 그에게 당시로서는 낯설기만 했던 미와 예술을 향한 학문적 의욕이 어떻게 싹텄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시대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고 말하면서 다시 시대의 배경을 들고 있다. 즉 1902년에 동경제대(東京帝大) 건축과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에 의해 조선 고건축물 조사가 착수된 이래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위한 주도면밀한 지식 체계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던 점, 다른 한편에서 독자적으로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17)을 편찬하여 조선 서화 세계에 관한 지도를 그리고자 했다는 점,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등을 통해 필명을 날리고 있던 일본인 야네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삼일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탄압을 비판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조선과 그 예술(朝鮮とその藝術)』(1922)을 발간하여 조선 예술의 독자성을 언급함으로써 지식청년들로 하여금 조선 민족문화에 관한 자의식에 불을 지폈던 점을 그 시대적 배경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는 "이러한 전후 사정을 고려하건대 애초에 그가 미학ㆍ미술사에 뜻을 두게 된 것이 미와 예술에 대한 그의 학문적 자각이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민족의 존망(存亡)에 대한 청년기 고유섭의 염려가 짙게 배어 있다. 그렇게 조선미술사 기술은 청년기 자신의 필생 기획으로 자리잡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미술사학자 강병희도 "그의 미술사학자로서의 행적은, 한국미술사를 펼쳐내어 이를 통해 한국미를 규명해보려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왜 하필 조선미의 탐구였을까"라고 묻고는 우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조선의 미의식과 가치가 표현된 조선의 미술이 조선 혹은 조선인을 대변할 수 있는 핵심적 단면임을 언급한다. 결국 이를 통해 조선, 즉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인문학적 동기가 엿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술평론가 최열은 "그는 문사철(文史哲)을 전유한 절정의 선비였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애를 일관해 사학의 거칠고도 힘겨운 숲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선생은, 언제나 거기 꽃피는 아름다움의 자태와 향기, 그 율동과 가락을 누리곤 했다. 조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밝혀 낱말로 드러내 보이는 일이야말로 곧 그 누림을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고자 한 뜻이겠다."

우현 자신은 이런 글을 남겼다. 즉 「아포리스멘(Aphorismen)」이란 글에서 '예술은 생명면과 같이 장엄하다. 진지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석굴암 전실과 주실의 인왕상과 사천왕상, 보살과 제자상 등의 배치 도판2.


예술을 유희(遊戱)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유희'라는 말에 비록 '고상한 정신적'이란 형용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유희'에 '잉여력(剩餘力)의 소비'라는 뜻이 내재하고 있다면, 예술을 위하여 용서할 수 없는 모욕적인 정의라 할 수 있다. 예술은 가장 충실한 생명의 가장 충실한 생산이다. 건실한 생명력에 약동하는 영원한 청년심(靑年心)만이 산출할 수 있는 고귀하고 엄숙한 그런 것이다. 한 개의 예술을 낳기 위하여 천생(天生)의 대재(大才)가 백세(百世)의 위재(偉才)가 얼마나 쇄신각골(碎身刻骨)하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는가를 돌이켜 생각한다면, 예술을 형용하여 '잉여력의 소비'같이,'고상한 유희'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가장 진지로운 생명의 가장 엄숙한 표현체(表現體)가 아니냐. …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古美術)을 관조(觀照)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剩餘殘滓)가 아니오, 누천년간(累千年間)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오,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함으로 해서 예술적 가치 견지에서 고하의 평가를 별문제하고서, 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敬愛)와 심절(深切)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한쪽의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고 말 것이냐. <『博文』 제3집, 1938년 12월, 博文書館/ 『우현 고유섭 전집』9, 열화당, p.88~89>

또한 「의사금강유기(擬似金剛遊記)」(1931년)이란 글에서 "미술은 철학이 아니요, 과학이 아니요, 시가(詩歌)가 아니다. 과거 미술을 논하자면 안전(眼前)에 제시할 수 있는 미술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미술품의 물질성만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정신을 수습할 수 있어야 한다. 미술사(美術史)는 역사만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미술사의 전제로 미술품의 수집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 불국사 전경. (『불국사와 석굴암』, 조선총독부, 1938)

이어서 「고대미술 연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1937년)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로 우리는 고대의 미술을 있는 그대로 감상도 하지마는, 고대의 미술을 다시 이해하려고 연구도 하고 있다. 이때 감상은 고대의 미술을 각기 분산된 채로 단독의 작품 속에 관조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극히 개별적인 활동에 그치나, 연구는 잡다한 미술품을 횡(橫, 공간적)으로 종(縱, 시간적)으로 계열과 순차를 찾아 세우고 그곳에서 시대정신의 이해와 시대문화에 대한 어떠한 체관(諦觀)을 얻고자 한다. 즉 체계의 역사를 혼융시켜 한 개의 관(觀)을 수립하고자 한다."


▲ 개방·자득의 미학
미술평론가 최열은 우현의 미술사학을 '개방과 자득의 장엄한 미술사학'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는 우현의 사학이 "칸트(J. Kant) 이래 독일 근대철학을 바탕에 깔고 우뚝 선 양식사와 정신사, 그리고 마르크스(K. Marx) 이래 과학적 역사학인 사회경제사와 더불어 고증에 전념하는 실증주의를 아우르는 폭넓은 방법론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말하고 이어 "하지만 오직 거기에만 한정하지 않았음을 발견하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 구체적인 예를 우현의 글을 인용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그 한 대목을 들어본다.

개방주의 관점을 전유한 선생은 또한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잊지 않았다. 1937년 12월 개성박물관으로 찾아 온 기자에게 조선 사람으로서 우리 것에 대한 연구가 뒤떨어져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이 아니면 될 수 없을 그 솜씨를 발견했고, 민족국가를 형성하고서 문화의 줄거리가 명확해진 이래 옛 조선의 아름답고 기운차고 힘있는 것을 찾아냈으며, 또한 예술에 나타난 민족 발전의 커다란 역사를 보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1938년에는 「아포리즘들」(Aphorismen)이라는 산문에서 예술을 유희로 보는데 대해 반대하면서, 조선의 고미술은 여유 있는 생활력에서 비롯한 잉여 잔재가 아니요 수천 년간 가난과 싸워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며 창조이고 생산이라고 토로했다. 가슴 저린 감정은 그렇게 드러냈으되 온통 기대지는 않았다. 1941년에 이르러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는, 우리가 조선의 미술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조선의 미의식의 표현체이자 구현체이며 조선의 미적 가치이념의 상징체이자 형상체라고 천명했다. 헤아려 보면 이야말로 선생이 자득한 논리와 체계, 그 방법이었던 것이다. <『우현 고유섭 전집』1, 「조선미술사 (상) 총론편」, 열화당, 2007, p.10~21>

미학자 이인범은 우현의 미술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서세동점의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 일제 강점의 격동기에 미와 예술에 관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누구도 걷지 않은'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그가 조선미술사를 왜소하고 편협하게 반식민 이데올로기에 가두기보다는 삶의 공동체 혹은 학문과 예술이라는 드넓은 대지 위에서 일궈내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그러한 그의 조선미술사는, 예술의 생성과정을 통해 그 특성과 본질에 다가서려는 끈질긴 방법론적 긴장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고유섭이 자신의 조선미술사 연구를 촉발시켰던 세키노의 조선미술사를 '고물 등록대장'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의 특질 규명을 '시적(詩的) 구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우현 고유섭 전집』8, 「미학과 미술평론」, 열화당, 2007. p16>

   
▲ 1941년 4월 경주 불국사 석굴암 답사 모습. 맨 왼쪽이 우현 고유섭 선생이며,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우현의 수제자인 황수영 선생(전 동국대 총장)이다.

▲ 아름다운 인연들
그러나 우현의 '조선미술사'는 미완성의 완성이다. 그것은 우현이 「조선미술약사(朝鮮美術略史)」를 비롯하여 주옥같은 글을 남겼지만 끝내 자신의 손으로 『조선미술사』를 간행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미완성이지만, 사후에 제자들과 후학들이 마침내 『조선미술사』상·하(열화당, 2017)를 간행하였기 때문에 미완성의 완성이다.

총론편과 각론편 두 권으로 나누어 편집된 『조선미술사』가 간행되기까지의 경과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도 우현의 학문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돼 소개한다.

"학자에게 저작 출판은 생명과도 같은 열매로되, 선생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작은 책 『조선의 청자』(1939년)만을 쥐었을 뿐이다"라는 안타까움과 불행이 있었다.

이런 안타까움을 가슴에 새긴 제자들이 나서 육필 원고로만 남아 있던 연구성과를 편집해 우현의 소망을 조금씩 현실로 이루어 나갔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스물한 해 동안 우현의 수제자인 황수영, 진홍섭이 주동이 되어 스승의 글을 엮어낸 것이다.

먼저 편집까지 끝냈으나 출간하지 못했던 『송도고적(松都古蹟)』(박문출판사, 1946)을 발간한 후 사후에 육필원고를 정리해『조선탑파(朝鮮塔婆)의 연구』(을유문화사, 1948),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서울신문사, 1949),『고려청자(高麗靑瓷)』(을유문화사, 1954), 『전별(餞別)의 병(甁)』(통문관, 1958),『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통문관, 1963) 등 여섯 권의 단행본들을 냈다. 그리고 이 책자들 외에도 비록 유인본(油印本)이지만『한국건축미술사초고(韓國建築美術史草稿)』('고고미술자료 제6집', 고고미술동인회, 1964),『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상·하('고고미술자료집 제8집', 고고미술동인회, 1965),『조선미술사료(朝鮮美術史料)』('고고미술자료 제10집', 고고미술동인회, 1966)『한국탑파의 연구 각론 초고』('고고미술자료 제14집', 고고미술동인회, 1967) 가 간행되었다.

이들 중 한국미술사에 관계 논문들을 모두 모으고 또 미발표 유고 등을 살펴 우현이 생전에 목표였던 '조선미술 통사'의 서술체계에 맞게 열여덟의 글을 모아 『조선미술사 총론편』 상권으로, 그리고 건축미술ㆍ조각미술ㆍ회화미술ㆍ공예미술으로 나누어 총 서른세 편을 묶어 『조선미술사 각론편』하권으로 재편성하여 발간한 것이다.

제자 황수영과 진홍섭이 없었다면 우현의 학문적 성과는 체계적으로 정리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만큼 아름다운 인연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