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여정을 넘어 새로운 도전에 나선 송도가 글로벌 창조도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송도센트럴공원과 주변 빌딩 숲 사이로 퍼져 나가는 형형색색의 불빛이 다가올 송도의 미래를 연출하고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다'. 인천이 그렇다.

바닷물이 넘실대던 곳이 흙으로 메워져 드넓은 땅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초현대식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마치 도화지에 색칠하듯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최첨단 디자인을 자랑하는 도시는 유엔 산하 기구들도 하나 둘씩 자리잡으면서 글로벌 도시로 비상하고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표현이 맞다.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중심에 인천경제자유구역청(IFEZA)이 있다. 그동안 글로벌 금융위기 등 도전과 시련도 많았다.

험난한 파도를 헤쳐나온 IFEZA는 지금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다름아닌 '창조경제'의 핵심인 '서비스산업 허브화'다. 이 목표를 향한 발걸음은 이미 내디뎠다.

본보는 IFEZA 개청 10주년을 맞아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인천의 미래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은 '절박함'의 산물이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업체인 부즈 알렌&해밀턴(Booz Allen & Hamilton)사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 한국경제를 '넛-크래커(nut-cracker·호두까기 기계 속의 호두)'로 표현했다.

13억 인구의 배후시장을 갖춘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전 세계 돈과 공장의 '블랙홀'이 돼 급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기술 등 산업 전반에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선진국으로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으면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돌파구가 없던 한국경제는 곧바로 IMF 외환위기를 맞는다. 장롱 속 금붙이를 내다 파는 등 온 국민의 피눈물 나는 고통은 3년 8개월간 지속된다.

2001년 8월 IMF 관리체제에서 조기 졸업할 때까지 험난한 여정은 이어졌다. 어찌보면 이 상황은 IFEZ 출발의 기폭제가 된다.

우리 경제는 90년대 말부터 성장세가 둔화됐다. 제조업 위주의 성장 한계와 서비스산업 경쟁 기반 취약 등으로 활력을 잃었다.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이 시기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다. 인천공항은 IFEZ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3.5시간 비행거리에 인구 100만 이상 도시가 61개에 이르고, 세계 최대 잠재시장인 중국을 배후시장으로 확보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서비스 면에서 세계 최고의 공항인 인천공항과 인천항이 존재한다. 세계 최고의 IT인프라와 중국보다 숙련되고 일본보다 값싼 노동력을 갖고 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특정지역(인천·부산·광양)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여론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

2002년 초 우리 경제 분야의 원로들이 나선다. 이들이 만든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경제특구 정책을 건의한다.

청와대가 움직였다. 재정경제부와 인천시 등이 실무작업을 통해 '경제자유구역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법률' 초안을 만든다.

국회도 동참한다. 관련법이 제정된다. 2003년 8월11일 송도·청라·영종 등 3개 지구 209.4㎢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이때부터 IFEZ는 인천의 변화를 이끌기 시작한다.

사실, IFEZ의 밑그림은 1986년에 만들어졌다. '동북아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가 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이던 박연수씨와 시 공무원들이 만든 작품이다. 그는 안상수 전임 시장 시절 기획관리실장을 끝으로 인천을 떠났다. 그는 인천을 떠날 때까지 IFEZ 태동의 실무책임자로 일을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성공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건과 상황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2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추진해 온 사업임을 회고한다.

'동북아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는 ▲송도 정보화 신도시사업 ▲영종·용유 국제관광휴양단지사업 ▲영종 신국제공항사업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인천은 위기였다.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과 똑같았다. 1·2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위기로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 여기에 인천은 정부의 수도권 개발억제정책의 대상이었다. 북한 장사정포의 사정거리에 있어 인프라 확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개발이나 투자는 엄두도 못내고 전략적 신도시 건설 또한 생각할 수 없었다. 이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인천은 미국의 자동차도시에서 몰락한 디트로이트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인천시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공영개발사업단을 만든다. 공개단은 우선 영종 신국제공항사업 추진을 위한 중앙정부의 움직임을 이끌어 낸다.

송도신도시 매립사업 추진에도 나선다. 영종 신국제공항사업의 경우 '서해안 시대'를 기치로 내건 노태우 정부 시절 국정과제와 뜻을 같이 하며 속도를 낸다.

이 때 '아시아의 용'으로 부상한 일본(간사이공항)·중국(푸둥공항)·홍콩(첵랍콕공항)·싱가포르(창이공항) 등 주변국 공항이 다가올 동북아 항공 물류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도 인천공항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89년 3월 노 대통령은 인천시 연두순시를 통해 인천공항 건설사업에 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영종과 용유도 사이 5610만㎡의 바다를 메워 2001년 3월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지금 공항서비스 분야 세계 최고 공항으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송도 정보화 신도시사업은 외상 공사로 시작했다. 당시 인천시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때마침 분양 시기를 맞춘 토지는 매각될리 만무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해외자본 유치다.

미국 게일사가 관심을 보였다. 인천시와 게일사간에 1년이 넘는 밀고 당기는 협상은 2002년 2월 최종 마무리한다. 게일사는 송도1·3공구 551만1000㎡의 땅에 127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2002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새해 연두교서에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를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김 대통령은 당시 재정경제부에 경제특구 정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한다.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됐다.

이후 IFEZ를 태동시킨 '동북아 국제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 방안'은 같은 해 4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를 통해 최종 확정된다.

'송도 정보화 신도시사업'은 'IFEZ를 선도하는 글로벌 도시 건설사업'으로 날개를 바꿔 달아 10년의 여정을 넘어 새로운 10년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치동기자 airin@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