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이 소설 탱고가 끝나갑니다. 삽화를 그리면서 문득 마지막으로 턱도 없는 반전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작업을 하면서 더 극적이고 더 심하게 가공된, 시쳇말로'막장'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가 많이 쏟아져서, 또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이상하게 되었는지….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소설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유롭습니다. 2011 김충순. 나무타일 30×30㎝ 먹, 과슈.


회사 일과는 별개로 내가 자살상담자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충격 때문이었다. 의사에게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대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었다. 실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과 숨쉬는 공기를 6개월 뒤에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였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슨 근거로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느냐고 의사에게 항의를 했다. 의사는 차갑고 냉정하게 병원기록실에 있는 각종 데이터를 통해서 그런 선고가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 데이터라는게 믿을 만한 것인가요?"
"그럼요. 90% 이상은 확실하다고 봐야죠"
의사 역시, 지금 자기와 대화를 하는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는 인간적 망설임이라든가 배려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아마 그런 의사의 태도 때문에 내가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믿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의사가 인간적 연민을 가지고 눈물까지 글썽거리지는 않더라도 촉촉한 목소리로 나에게 그런 선고를 내렸다면 나는 아마 울컥하면서 왜 이런 형벌이 나에게 주어졌는지 고민도 하고 하늘도 원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살아온 날들을 정리했을 것이다.
나는 6개월 시한부 인생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술을 끊었고 휴가를 얻어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밑 구례 산동의 작은 마을 민박집에 방을 얻어 1년치 휴가를 한꺼번에 몰아쓰면서 나는 천천히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탱고를 만났다.





탱고는 나를 죽음에서 꺼내준 동아줄이다. 나는 탱고를 통해 죽음의 그늘에서 삶의 햇볕으로 걸어나왔다. 6개월이 훨씬 지난 뒤에도 내가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탱고 때문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탱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들른 병원에서도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 사이 담당의사는 교체되었는데, 새로운 의사는 나를 유심히 진찰하고 관찰하더니 굉장히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술도 끊고 운동도 계속 하시면서 몸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물론 좋은 약도 개발된 이유도 있지만요.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한 십년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아르헨티나 지사 근무를 자원하게 된 것은 오직 탱고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살려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가고 싶었다. 그것에서 직접 탱고를 배우고 탱고를 추고 땅게로스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다행히 한국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먼 나라, 비행기 타는데만 30시간 가는데만 이틀이 걸리는 그곳에 자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르헨티나 지사 발령이 확정되자 나는 제일 먼저 초이를 떠올렸다. 초이라면 나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초이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는 십년 넘게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지만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원수처럼 싸우고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연인이 된다는 것이다.
초이는 나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나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 위해서 그녀는 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를 초이는 나를 위해 해주었다.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층 거주지역인 레꼴레따에 아파트를 얻었다. 아르헨티나 지사장 월급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십년 넘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이렇게 같이 살기는 처음이었다. 짧은 기간 같이 여행간 적은 있지만 여행과 거주는 다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초이와 함께 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지난 1년이었다. 우리는 신혼부부였다. 함께 팔짱을 끼고 마트에 갔고 극장에 갔으며 탱고쇼를 봤다.
나는 초이에게 탱고를 배울 것을 권했다. 그녀는 부에노스에 이민온 후 탱고를 배워서 탱고 강습을 하고 있는 한국 땅게라 라우라에게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초이가 탱고 강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더욱 행복해졌다. 우리는 거실의 소파를 모두 방에 집어 넣고 거실을 텅 비워 두었으며 우리의 거실은 우리만의 밀롱가가 되었다.





나는 초이와 처음 탱고를 출 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내가 홀딩한 초이는 내가 모르는 초이였다. 나는 처음 본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으며 그녀를 안고 있었다.
우리는 탱고를 추면서 진정으로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십여년간 알아왔던 그 초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음악에 귀를 집중했으며, 서로의 가슴으로 그것을 교감했고 드디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탱고는 섹스를 할 때보다 더 깊숙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내가 초이였고 초이가 나였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눈물이 나왔다. 엉엉 소리 내어서 울고 싶었지만 울음은 목에 걸려 잠겼고 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초이도 울고 있었다.
나는 회사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거나 시내에서 초이와 만나 저녁을 먹었다. 부에노스 사람들, 이른바 뽀르떼뇨들은 저녁을 9시 넘어서 먹는다. 땅게로스들은 탱고바에 가서 와인과 음식을 시켜 그곳에서 춤도 추고 허기도 채운다. 고기를 좋아하는 뽀르떼뇨들은 탱고를 추고 난 뒤에도 레스토랑으로 몰려가 엄청나게 많은 양을 먹었다.
나는 간경화로 더 이상 술을 먹을 수 없다는게 아쉬웠다. 붉은 와인을 마시며 초이와 탱고를 추면 얼마나 즐거울까.
우리는 시내 외곽의 밀롱가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다운타운의 유명한 밀롱가, 가령 월요일의 살롱까닝, 화요일밤의 까치룰루나 수요일의 니노비엔, 목요일의 이데알, 금요일의 쁘락티까 엑기스, 토요일의 엘베소, 일요일의 쁘르떼뇨 이 바일라린을 오히려 피해 다녔다. 매일 밤 수백개의 크고 작은 밀롱가가 열리는 부에노스에서 우리가 춤출 밀롱가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한 탱고를 추고 싶었다.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치이며 날카롭게 긴장하고 탱고를 추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