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넘겨버리기엔 아무래도 냄새가 나…. 시간이 앞뒤가 맞물리지 않는다.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만 같다. 어젠 빗길에서 큰 대(大)자로 넘어졌다. 너무 창피해서 후다닥 도망치듯 그 자릴 피했는데 어깨를 다친 것 같다. 하루가 지난 지금 많이 시큰거린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빠지기까진 비가 온 탓도 있지만, 운동 부족으로 하체에 힘이 없어서 그럴 거란 생각을 한다. 켄트지 200X210㎜, 연필, 수채, 김충순 그림 2011.


박 부장의 부검 결과가 나왔다. 범죄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뒷골목 범죄자들이 돈을 노린 우발적 범행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원한이나 치정 등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칼끝에 실리면, 범인이 칼을 잡는 위치부터 다르고, 칼이 몸속으로 들어간 깊이까지 다르다. 칼의 방향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런데 박 부장의 몸에 난 수십군데의 칼자국을 분석한 결과,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단순강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검을 하면서 뜻밖에 알게 된 것은 박 부장이 간경화를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간은 단단하게 퉁퉁 부어 있었고, 역시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박 부장은 사건이 없었어도 6개월에서 많아야 2년 정도밖에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박 부장은 이 사실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이 정도 몸에 이상이 왔으면 몰랐을리 없다. 그런데 왜 그는 귀국을 요청하지 않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자신의 인생 마지막을 보내려고 한 것일까. 그것도 초이와 함께?
범인은 여전히 흔적없이 사라져버렸고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외국 땅에서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경찰력이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아무리 유족들이 항의하고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에서 부탁을 해도 현지 경찰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유족들이 언제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 수는 없다. 그들은 시신을 한국으로 가져가서 화장할 것인지, 현지에서 할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현지에서 화장하고 유골만 가져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다다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초이가 사건 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를 의심케 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초이의 설명할 수 없는 행적에서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담겨져 있다고 다다는 생각했다. 물론 경찰에 진술할때 세 사람이 옷을 벗고 쓰리섬을 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새벽에 만나 아침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고 진술을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도 심증이 간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다다는 알 것 같았다. 초이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고, 그녀가 범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초이가 박 부장 살해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다다는 생각했다.
보름동안 거의 매일, 다다와 라우라, 가르시아는 만났다. 다다와 라우라만 만날 때도 있었고, 라우라의 일 때문에 다다와 가르시아만 만날 때도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날도 많았다. 다다와 라우라는 사건 이후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잤다. 이과수 폭포 촬영을 위해 서울에서 온 방송취재팀을 코디를 맡은 가르시아가 부에노스를 출발한 날 밤이었다.
죽음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박 부장의 충격적 죽음을 겪고 있기 때문에 섹스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다의 아파트에서 두 사람만 있게 되자 전혀 사정이 달라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곧 무서운 성욕으로 변했다. 옷을 벗기 전부터 그들은 서로의 몸 전체가 날카로운 성감대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 곁에서 하는 섹스는 훨씬 더 자극적이었고 그들이 아직 싱싱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장마철 남지나해에서 올라오는 여자 이름의 태풍처럼 격렬한 섹스였고, 그만큼 짜릿했었다.




두번째 섹스는 서로를 편안하게 만든다. 우발적인 일회용 섹스가 아니라 이제 그들의 관계가 항구적인 관계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려서 라우라는 물었다.
"정말 강도가 그랬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애"
"그렇죠?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수십번 반복한 이야기였다. 결론이 날 수 없는 이야기의 끝이 그렇듯이 무수한 상상력과 억측으로 반죽된 구름이 하공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강도가 아니라면,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면, 누군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박 부장을 살해했다는 것이 된다.
누굴까? 한국에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머나 먼 아르헨티나까지 와서 박 부장을 살해했을리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현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의 어떤 원한을 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직 그들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저절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초이.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머리를 흔들어서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설명할 수 없는 그날 밤의 일이 끈끈하게 그들의 감각세포 속에 남아 있었다.
"만약, 초이가 그랬다면, 아니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건에 초이가 관계되어 있다면, 왜 그랬을까요?"
다다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초이가 직접 설명해주지 않는한 그것은 알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진짜 초이가 그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거기서 상상력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초이의 흔적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박 부장과 함께 살 때도 그녀의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박 부장 가족들이 서울에서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그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디에서도 그녀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가장 큰 도시이다. 변두리든 시내 중심지이든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숨어 있다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호텔이든 아파트이든 방안에만 머물러 있고 해가 진 뒤 집 근처의 슈퍼나 들락거린다면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만약 초이가 아직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남아 있다면, 밤에 밀롱가라도 한 번 나오지 않았을까 그들은 생각했다. 탱고를 추는 사람들이 마약처럼 탱고를 끊기 어렵다는 것을 다다와 라우라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안나가려고 결심해도, 해가 저물고 탱고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면 몸 속에 잠들어있던 탱고의 피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의지가 세워둔 둑을 무너 뜨리고 용솟음치며 솟구쳐올라 결국은 한 걸음에 밀롱가까지 뛰어가게 만든다.
그런데 초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밀롱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수 백개의 크고 작은 밀롱가가 있다. 그 모든 곳을 조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그들이 다녔던 밀롱가의 동선에서는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혹시 그녀도 누군가의 손에 나쁜 짓을 당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다만 그렇게 생각은 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섹스가 끝난 후 침대에서 라우라는 물었다.
"만약……"
"말해봐, 만약, 뭔데?"
"만약…. 초이도 나쁜 짓을 당했다면 어떡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