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벨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탱고 음악을 들으며 다다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벨소리에 벌떡 일어난 것이다.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디지?' 시공간이 정지되고 머리 속이 창백하게 멍해진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눈은 떴지만 공간감각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벨이 울렸다. 그때서야 여기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이고 자신은 한국을 떠나 다시 이곳에 왔다는 자각이 들었다.
1층 출입문을 자동으로 여는 버튼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비싼 아파트는 아니었다. 다다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1층 현관문 밖에 가르시아와 라우라가 서 있었다. 라우라와 다다는 가볍게 껴안고 베소를 했다. 라우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예전과는 다르게 라우라는 다다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강렬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다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정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태도였다. 이제 다다는 라우라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리오 노르떼 지역은 레꼴레따나 팔레모 지역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상류층 거주 지역에 속한다. 레꼴레따만큼은 아니지만 다다가 임대한 아파트 주변에도 고급 레스토랑이 많이 있었다. 저녁이 되자 날씨가 선선해지고 밖에서 식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되었다.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중에서 밖에 테이블을 내놓은 곳에 앉았다. 부에노스의 저녁 식사는 밤 9시 전후다. 식사를 주문하고 와인을 마셨다. 가르시아와 라우라는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해 물었고 다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대답해 주었지만 사실 인터넷에 모두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라우라는 오늘 현지 코디를 맡아 안내를 했던 한국 방송팀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각각 다른 생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르시아는 라우라가 다다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피해줄 시간이 언제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다는 라우라와 두 사람만 단 둘이 남는 시간이 두려웠다. 라우라는 적극적으로 가르시아에게 눈치를 하기 시작했다.
"가르시아 탱고 실력이 궁금한데? 같이 밀롱가 가볼까?"
"오늘 밀롱가 갈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탱고화를 안가져왔는데."
가르시아는 탱고화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빠질까 생각했다. 하지만 라우라는 지금 두 사람만 남는 것은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질거라고 판단했다.
"트렁크에 탱고화 하나 있잖아. 가자."
가르시아는 탱고를 추기 시작하면서 항상 차 트렁크에 탱고화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라우라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이 밀롱가에 가자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토요일 밤이었다. 부에노스 시내의 어느 밀롱가에 가도 새벽 5시까지 흥겨운 탱고파티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까치룰루다. 마이푸 444번지의 클럽 보헤미안에서 열리는 밀롱가 까치룰루는 다다가 서울에 있을 때도 문득문득 생각났던 밀롱가였다. 공간은 크지 않지만, 발 디딜 데 없이 그 좁은 공간을 꽉 메운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일정하게 한 발자국씩 진전하면서 탱고를 추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앞 사람과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물흐르듯이 흘러가는 모습은 꿈에 나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가르시아의 차를 타고 세 사람은 오벨리스끄와 오쵸 데 훌리오를 지나 꼬리엔떼스 대로로 향했다. 토요일 밤의 부에노스 시내는 새벽까지 사람들로 넘쳐난다. 관광객들이 항상 많이 모이는 꼬리엔떼스 대로지만 현지 사람들도 토요일밤은 집에 있지 않고 파티를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밤 11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이제 초저녁이나 다름없었다.
까치룰루 근처의 좁은 골목에 차를 세우고 세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1층 문밖의 거리에서는 탱고화를 신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녀들이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탱고화는 현지에서도 비싼 가격이다. 탱고 연습할 때는 연습화를 신고 밀롱가에 가거나 공연을 할 때만 탱고화를 꺼내 신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소중하게 아껴 신는 편이지만, 유럽에서 온 땅게로스들은 탱고화를 신고 아스팔트길을 걸어 다니기도 한다. 신발이 튼튼하고 착용감도 좋은데다 디자인도 괜찮아서 갈아 신기 귀찮아하는 땅게로스들은 탱고화를 신고 거리를 다니기도 하기 때문에, 이렇게 탱고화를 신고 거리로 나와 담배를 피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인인 경우가 많다.
까치룰루에는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모퉁이 구석 자리에 테이블을 하나 얻어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라우라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우라는 까치룰루의 오가나이저와 입구에서 베소를 하고, 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는 원로들과도 일일이 베소를 했다. 부에노스 밀롱가에서 라우라는 많은 공연을 통해 최상급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이 밀롱가였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에 앉기가 불가능한 날이었지만 오가나이저는 테이블을 밖에서 들고 와서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더.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까베세오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직접 신청하지 않으면 플로어에 나가기 힘들었다. 아니면 주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춤을 추어야 했다. 탱고화로 갈아신는 동안 라우라는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라우라는 제일 먼저 가르시아와 춤을 추었다. 가르시아의 탱고실력은 괜찮았다. 이제 겨우 세 달의 초급 수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유연함과 리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다는 딴다가 시작된 후 첫 곡은 그냥 플로어를 보고만 있다가 한 곡이 끝난 후 바로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키 큰 여자에게 춤을 신청했다. 한눈에 봐도 관광객이었다. 첫 곡을 춘 후 물어보았더니 그리스에서 왔다고 했다. 항상 부에노스 일급 밀롱가의 1/3은 세계 각국에서 온 땅게로스들이다. 누에보 스타일이어서 동작이 컸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다는 이미 부에노스 밀롱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난번 보다 능숙하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부에노스에 온 첫 날이라 아직 몸이 굳어 있었다. 그리스 여자에 이어서 독일 여자, 그리고 스웨덴 여자와 연속으로 춤을 춘 후 비로소 라우라와 홀딩할 수 있었다. 탱고 네 곡이 연속으로 흘러나오는 한 딴다가 끝난후 다음 딴다가 시작될 때가지 짧은 쉬는 시간에 흘러나오는 꼬르띠나 시간에 이미 라우라는 다음 딴다에 춤을 출 상대가 정해졌다. 그만큼 그녀는 밀롱가에서 인기가 좋았다. 플로어에 앉아 있는 시간이 없었다.
탱고를 추기 위해서였지만 세 달 만에 라우라와 홀딩하는 순간, 다다는 스스로 라우라와 홀딩하던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탱고를 추는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느낌이었다. 다다는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탱고를 추면서 상대가 여자로 느껴진 것은 초이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초이가 보고 있는 것 같고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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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니, 세상 수컷들은 암컷들 때문에 신세를 조진다는 걸 다시 또 깨닫고서 지나온 내 삶을 뒤돌아 본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음을 부정 못한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놈, 속마음은 굴뚝같지만 겁이 많아 쪼다 같은 놈, 이런 놈, 저런 놈, 별별 놈이 다 있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뒤질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용감무쌍한 불나비도 못 되는 것들이…. 켄트지. 210X290㎜. 연필, 수채, 포토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