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시인 이장희 선생님의'봄은 고양이로다'가 생각났습니다. 색채의 마술사 보나르작품 시에스타(Siesta)도 떠올랐습니다. 이 나른한 봄날에 낮잠 한숨 뻐드러지게 때려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2011 김충순, 210㎜x290㎜ 켄트지 위에 연필, 수채물감.


박부장의 이혼 소식을 듣고 먼저 전화를 한 사람은 초이다. 그들은 삼청동 가는 길에 있는 한옥 와인바에서 만났다. 박부장은 요즘 와인을 공부하는 중이라면서 약속장소를 그곳으로 잡았다. 박부장은 누구처럼 밤 10시에 호텔 칵테일바로 초이를 불러내는 것처럼 노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혼했다고 해서 더 자유스러워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을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했다.

박부장은 먼저 스페인산 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바디가 무겁고 드라이 한 까르비네 쇼비뇽이었다. 한 병을 다 비운 후에는 이탈리아산 까르미네르를 주문했다. 첫맛은 드라이했지만 중간에는 조금 신 맛이 입안을 감돌다가 끝 맛은 달콤한 아주 특별한 와인이었다. 한옥에서 마시는 와인은 독특했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비주얼은 없지만, 세련된 인테리어보다 오히려 한옥의 검은 기와지붕과 처마와 서까래가 주는 은근하고 조용한 고즈넉함이, 와인의 붉은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묘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초이의 마음속에서는 그래도 박부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비록 집안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부장이 자신과 격렬하게 섹스를 하다가도 밤 12시가 되기 이전에는 항상 샤워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집에 있는 부인 곁으로 돌아갈 때도, 그가 성실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질투는 있었지만 그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박부장이 초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만나다가 부인에게 들켜 이혼을 당했다는 소식은 초이에게 충격적이었다. 대학 때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 그동안 함께 해왔던 세월이 거짓이 되고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초이는 자신이 알맹이는 빠진 빙과류 비닐껍데기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길에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더라도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는 쓰레기처럼 생각되었다. 초이는 박부장을 만날 때 그런 내색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한옥 와인바를 나와 그들이 간 곳은 남산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다. 박부장의 성기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올 때 초이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크고 단단했으며 그는 초이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익숙하게 애무를 했고, 체위를 바꿔가며 섹스를 하는 순서도 비슷했다. 그런데 초이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느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예감은 11시30분 박부장이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적중했다. 이혼한 그가 마치 집에서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예전처럼 12시가 되기 전에 귀가하려는 것이다. 초이는 화가 났다. 그녀는 박부장에게 소리쳤고 그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을 때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박부장은 초이의 손에 이끌려 방안을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양복 상의를 걸쳤다.

"그렇게 갈 거면 왜 방을 잡았어? 나 혼자 이 방에 남는 게 좋아?"

초이가 무슨 말을 하든 박부장은 대꾸를 하지 않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이 기다리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니잖아. 부인이 애들 데려갔다며. 그런데 왜 가려고 하는 건데?"

"만약 이대로 간다면 나도 다른 남자 불러서, 아직 당신 체온이 남아 있는 이 침대에서 아침까지 섹스하며 뒹굴 거야."

박부장은 번쩍, 초이의 뺨을 후려쳤다.

"제발 그렇게 해. 그게 소원이라면 남자 5명쯤 불러서 그룹섹스나 해. 남자 모자라면 내가 얼마든지 불러줄게. 넌 머릿속에 그저 섹스밖에 없는 섹스중독자야. 내가 왜 너를 만나는지 알아? 룸살롱 가면 너 같은 애들 수천 명 널려 있어. 룸살롱에서 비싼 양주 마시는 것보다 너랑 와인 마시는 게 훨씬 싸니까 너를 만나는 거야. 알아?"

그날 밤, 초이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결국 남자 한 명을 호텔로 불러내 같이 잤다. 자신 주변을 오래전부터 맴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남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마음가지 않는 남자였다. 절대 저런 남자하고는 섹스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였다. 일부러 그 남자를 부른 것은 아니다. 과거에 자신과 같이 잤던 남자들은 모두 연락이 안 되거나 너무 늦어서 나오기 곤란하다는 대답이었다.

그 때 초이는 그 남자가 생각났다. 키도 작고 얼굴도 평균 이하였다. 그러나 돈은 많았다. 아버지가 강남에 큰 빌딩이 있고, 전국 여기저기에도 부동산이 많다고 소문난 남자였다. 집에서 관리하는 빌딩 관리인으로 먹고사는, 즉 백수나 다름없는 존재여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남자였다. 그 남자는 초이의 전화를 받자 주저 없이 달려왔다.

초이는 전화를 끊고 나서 후회를 했다.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왜 이런 하등급 남자를 불렀을까? 다시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호텔 방호수를 말한 상태였다. 그녀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렸다.

새벽 1시쯤 벨이 울렸고,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실내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알몸으로 호텔방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그 남자의 놀라는 표정은 오래도록 초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커다랗게 확대된 동공, 쩍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 못하는 입, 그리고 굳어버린 몸. 그러나 곧 그 남자는 정신을 수습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문 안으로 들어온 그는 가지고 온 와인병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 한 손으로는 자신의 옷을 벗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초이의 젖가슴을 만졌다. 벽에 그녀를 밀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검은 젖꼭지를 빨았다.

그런데 왜 초이는 박부장을 따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오게 된 것일까? 호텔 사건 이후, 초이와 박부장의 관계는 한동안 끊어졌다. 초이는 정말 박부장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하려고 했다.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박부장이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 기간이 박부장과 초이가 지금까지 만나는 동안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박부장의 재혼 소식을 들은 지 6개월도 안 되어서 박부장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초이는 핸드폰에 떠 있는 박부장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화는 길게 울렸다. 초이는 받지 않았다. 1분 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초이는 전화가 거의 끊어질 때까지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박부장은 예전처럼 초이에게 저녁을 사주고, 별 세 개의 호텔로 데리고 갔으며, 섹스를 했고, 12시가 되기 전 침대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초이의 마음 속에서는 서서히 증오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박부장에 대한 사랑만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가슴에 증오가 자리 잡기 시작해서 절반을 넘어 이제는 몸 전체를 가득 채웠다.

박부장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자고 했을 때, 초이는 이게 그와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갈 때는 두 사람이 가지만 올 때는 한 사람만 돌아올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