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 남녀가 땀 범벅으로 끈적거리는 몸뚱이를 비비적거리며 춤인지 애무인지…. 그림을 그리기 전엔 환상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현란한 색으로 그렸는데. 요즘 뉴스에 쓰나미 장면을 보며, 모든 것이 말짱 헛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를 쓰면서 단세포적으로 들이댑니다. 자연이며 그냥 생물임에 충실하고 싶은가 봅니다. 2011 김충순. 300㎜×300㎜ 목판 위에 먹, 수채.


박은화는 신사동 가로수 거리의 한 카페에서 박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15분 늦게 박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끌고 들어왔기 때문에 최은화는 깜짝 놀랐다. 혹시 자신에게 성적처리를 일임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교수는 여행용 가방을 열고 200명의 중간고사 답안지와 기말고사 답안지를 꺼냈다. 그리고도 가방 속에는 종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교수님, 저건 뭐예요?"
박교수는 대답대신 그 종이들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학생들이 낸 레포트의 표지들이었다. 한 학기동안 3개의 레포트를 냈으니까, 600장이 쌓여 있는 것이다. 한 권 책이 될 정도로 두껍게 묶어서 레포트를 낸 학생도 있고, 색깔있는 종이로 예쁘게 표지를 만들어서 제출하거나, 화일북에 레포트를 끼어서 낸 학생도 있었기 때문에, 레포트 앞장 표지만이 아니라 표지를 뜯을 수 없는 파일북과 제본된 레포트들도 끼어 있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리필해가며 최은화는 박교수가 채점한 성적들을 박교수가 가져온 노트북에 입력했다. 노트북에 성적을 입력하기 전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박교수의 노트북에는 엑셀이 안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화는 컴퓨터를 잘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엑셀 파일을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근처에 있는 피시방을 찾아가서 자신의 USB에 엑셀 화일을 저장한 뒤, 다시 카페로 돌아와서 USB에 있는 엑셀 파일을 박교수의 노트북에 깔았다. 그리고 성적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후 3시에 만났으니까, 저녁 7시쯤이면 작업이 다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차 한 잔 마시고 엑셀 파일 받으러 피시방 다녀오고 하는데 거의 2시간 가까이가 지나가버렸다. 저녁 8시가 되어도 그들은 작업을 다 끝내지 못했다. 카페에서 5시간이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의 눈치도 보였다.
"저녁 먹고 할까?"
박교수의 제의에 최은화는 시계를 보고, 남아있는 레포트들을 보았다. 2시간 정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면 10시, 그때까지 참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빵도 먹었지만 허기가 졌다.
그들은 가로수 거리 뒷 골목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레스토랑에도 빈 자리가 없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20분 정도 대기를 해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박교수는 식사와 함께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박교수는 여름방학 기간동안 최은화가 유럽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여행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항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이야기는 신선하다. 박교수의 웃지 못할 경험담을 들으며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박교수는 와인을 추가로 한 병 더 주문을 했다. 이제 그들의 머리 속에 처리해야 할 성적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박교수는 여행 중 만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은화는 귀를 세워 그의 말을 들었다. 박교수는 자신이 해외체류를 할때 만났던 여자들과,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만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침대위의 묘사까지 하면서 들려주었다. 수많은 여자들 중 브라질 여자가 최고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와인 두 병을 다 비웠을 때 최은화에게 박교수는 자신이 한 학기동안 수업을 들은 교수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새벽 1시가 되어 레스토랑을 나온 그들은 근처에 잇는 모텔로 들어갔다. 박교수는 최은화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듯이, 그는 최은화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갔다.
최은화에게 박교수가 첫 남자는 아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 친구 소개로 친구의 오빠를 만났고, 3학년이 되기 직전인 봄방학 때 그와 잤다. 그후 5명의 남자를 더 만났다. 최은화는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경험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섹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잠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남자를 즐겁게 한다는 것도 그 동안의 실전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박교수와 자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최은화는 그날 박교수와 처음 섹스를 하고 난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서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진정한 의미에서 여자로 만들어준 사람은 박교수였다. 박교수 이전까지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이제 생각해보니 남자들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 뜨겁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몰랐고, 다른 남자들하고 자면서 이게 최후의 선이라고 느꼈던 오르가즘의 능선이 사실은 작은 언덕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교수는 최은화를 대관령 굽이굽이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가듯이 이제 끝이다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고,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마지막 고개라고 생각한 순간, 그 너머 또 다른 고개로 그녀의 몸을 끌고 갔다.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의 깊이가 이렇게 깊고, 그 끝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박교수와의 섹스가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를 치른 것이라면, 그때까지 만난 남자들과의 섹스는 아마추어 중등부 예선전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최은화는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박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섹스를 했다. 박교수를 만난지 불과 열흘 사이에 최은화의 몸은 놀랍도록 달라져 있었다. 유럽 여행 중에도 최은화 머리 속의 생각은 박교수 뿐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지금 이 순간 박교수와 떨어져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궁금할 정도로 그녀는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국제전화를 했다.
박교수는 시간강사였고 최은화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봄 학기에 "디자인과 생활"을 강의하는 게 전부였다. 따라서 가을 학기에 학교에서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박교수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최은화 마음은 더욱 홀가분해졌다. 담당 과목 교수와 잔다는 약간의 죄책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책감이기도 하지만 또한 어느 면에서는 우월감이기도 했다. 박교수와의 관계는 최은화로 하여금 또래의 학생들과 자신이 한 차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결국 늦가을 낙엽이 지기 시작할 무렵, 박교수와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처럼 박교수의 수업을 들었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녀는 불과 일주일 뒤에 자신과 박교수의 관계가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해가 지나고 그 다음 봄학기가 시작될 때 "디자인과 생활"의 강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은화는 박교수에게 미안했다. 공식적인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런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학부 교수들에게도 전해졌으며 학교에서는 강사와 학생의 문제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파고 들며 확인하려고 하는 대신, 담당 강사를 교체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