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붓을 들고 큰 화폭 앞을 정신없이 걸어 다닙니다. 걸음에 맞춰서 들려오는 건 환청인지, 진짜 음악 소리인지, 난 작업대 앞에서 막춤을 춥니다. 김충순 그림 2010, blog.daum.net/minari56


초이의 인사를 받고 다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탱고클럽 '비엥 뽀르떼뇨'에 오기 직전, 셀마와의 격렬한 섹스의 여운이 아직도 다다의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상태에서 초이의 인사를 마냥 반기며 받을 수는 없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셀마는 이미 탱고화까지 신고 있었다. 초이가 큰 키에 작은 얼굴로 8등신의 균형 잡힌 황금비율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면, 셀마는 작지만 귀여우면서도 통통 튀는 단단한 공처럼 탄력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꼬르띠나가 끝나고 발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3/4박자의 발스 음악은 금방 실내를 흥겹게 만들었다. 4/4박자의 탱고 음악과는 달리 발스는 3박자이기 때문에 경쾌했고 날렵했으며 파도의 꼭지점처럼 솟구치는 부분과 내려앉는 부분의 차이가 명확했다. 실내가 둥글게 원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나타가 다다를 보며 셀마에게 춤을 신청해도 되느냐는 제스처를 했다. 다다는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타도 직감적으로 셀마와 다다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어서 다다는 조금 당황했다. 다나타와 셀마는 플로어로 나갔다.
거의 동시에 초이도 일어섰다. 초이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멋있게 기른 이탈리아계 남자와 홀딩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광 가이드들은, 부에노스는 이탈리아 사람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면서 프랑스인 흉내 내면서 사는 곳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낼수록 가이드의 그 말이 가장 정확하게 부에노스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초기 정착인은 스페인 사람들이었지만 19세기말부터 이탈리아를 비롯한 그리스 터어키 등 발칸반도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지금은 인구 비율로 보면 이탈리아 혈통이 전체의 40퍼센트를 웃돌고 있고 스페인계는 오히려 2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스 프랑스 터어키 독일 등 유럽 각국 사람들의 후손들이 남미 원주민과도 피를 섞으면서 다양한 분포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이나 생활 방식은 프랑스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제 2외국어로 영어 못지않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곳이 많다.
꼬르띠나 시간에는 클럽 안에 잇는 남자와 여자의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관심 있는 상대를 서로 탐색하고 서로 눈을 맞춘 뒤, 춤을 춰도 좋다는 사인이 오가면 그들은 플로어로 나간다. 이것이 까베세오다. 곧 라우라도 플로어로 나갔다. 키가 큰 아르헨티나 남자와 홀딩을 했다. 전에 라우라와 함께 밀롱가 '라 비루따'에 갔을 때 한 번 본 얼굴이었다.
탱고클럽 '비엥 뽀르떼뇨'는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탱고바다. 붉은 벽돌로 벽면이 가지런하게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많은 탱고 그림들이 같은 높이로 장식되어 있다. 천정 바로 밑에는 검정 스피커가 홀 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고, 붉은 벽을 등지고 붉은 의자가 플로어를 향해 한 줄로 가즈런하게 놓여 있다. 의자 사이에 작은 테이블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 위에 찻잔이나 맥주를 올려놓고 마신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을 주는 탱고바였다.
가르시아가 다다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지낼만한가, 탱고 배우는 것은 재미있나, 식사는 어떻게 하나, 이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다다는 알고 있었다. 지금 가르시아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드디어 가르시아가 입을 열었다.
"초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데요."
다다는 가르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 심각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다다는 아무 말 없이 가르시아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입술 부위가 경직되어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평상시의 낙천적이고 활기차며 유머러스한 가르시아가 아니었다.
"제 친구 중에 무역 일을 하는 애가 있어요. 아, 한국 사람이에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제가 관광일 코디하기 전에 사업 했었다구요. 의류 쪽 사업."
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뭔가 좋지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르시아의 말을 여기서 끊고 싶었다. 세상에는 몰라도 될 일이 있고 꼭 알아야만 하는 일도 있지만, 항상 이렇게 심각하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끝은 좋지 않다. 다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34년의 경험으로 곧 자신 앞에 풀기 힘든 곤란한 숙제가 놓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전체의 의류 사업은 유태인 다음으로 한인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어요. 재단에서 부터 시작해서 봉제, 단추, 나염, 다림질 등 거의 모든 분야에 한인들이 진출해 있어요. 소매점도요. 사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한인들 대부분이 의류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지요."
아베쟈네다 지역에 가면 수많은 옷가게 도매상들이 늘어서 있다. 그 중 상당수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다. 옷의 품질은 동대문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의 의류산업은 상당히 발달해 있다. 북반구에 있는 유럽에 비해서 남반구에 있는 이곳은 6개월 정도 계절이 앞서가기 때문에,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제품을 이곳 시장에 내놓고 반응을 살피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다다는 가르시아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서두를 늘어놓나 싶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의류 사업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지난번 플로리다 거리의 카페에서 다다 형 환영파티 한 적 있잖아요. 그때 초이는 파티 거의 끝날 때 왔잖아요? 다른 파티에 참석했다가 오는 거라고…."


그렇다. 드디어 가르시아의 입에서 '초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다다는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다. 가르시아가 자신에게 다가와 무엇인가 은밀한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그것이 초이에 관한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을. 가르시아나 라우라는 눈치 챘을 것이다. 플로리다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다다의 환영식을 한 날 밤, 다다와 초이만을 남겨 두고 그들이 떠났을 때, 그 다음 벌어질 일을 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다는 가르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플로어를 보니까 다나타와 셀마 커플 바로 뒤에서 초이 커플이 춤을 추고 있었다. 다나타는 능숙하고 부드러운 스텝으로 셀마를 리드하고 있었고, 셀마는 지그시 눈을 감고 황홀한 표정으로 탱고를 추고 있었다. 초이는 춤을 추면서 가끔 다다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슬쩍 바라보기도 했다. 홀을 둥그렇게 도는 원의 반대 방향에서 라우라 커플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제 친구가 그날 밤 다른 파티에서 초이를 만났다는 거에요. 제 친구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 3살짜리와 이제 백일 지난 애가 있거든요. 얼마 전 백일잔치해서 다녀왔어요. 아이가 부인과 똑같이 생겨서 질투를 하더라구요. 자기는 별로 안닮았다고. 그 녀석은 원래 이곳 주재 상사원이었는데 이민 2세대 한국여자와 만나서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한 케이스에요. 그런데 그 파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한국 대기업 간부들이 모이는 파티였는데, 부부 동반 파티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초이는 누구와 그 파티에 참석했을까? 분명히 그녀는 탱고를 배우기 위해 세 달전 혼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고 했다. 가르시아는 다다의 궁금증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부부 혹은 연인 등 커플끼리 참석하는 파티였데요. 거기서 그 친구가 초이를 만났는데 어떤 중년의 한국 남자와 파트너가 되어 참석했다는 겁니다. 초이가 누나에게 탱고를 배우러 다닐 때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왔다가 초이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거든요"
초이는 한 번 만난 사람이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타입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중앙에 서 있다. 카페에 가도 항상 가운데 자리나 로얄석을 찾아 앉는다. 탱고 클럽에 갈 때도 그렇다. 환하게 웃는 웃음으로 입구에 서 있는 오가나이저의 마음을 뒤흔들고 가장 좋은 좌석을 배정받는다. 아마 가르시아의 친구라는 사람과 인사를 했을 때도 그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 친구 말이 결혼한 것 같지는 않고…."
가르시아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다다는 망설이지 말고 계속 해보라는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가르시아가 다소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는 다다에게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되나라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초이랑 같이 온 남자는 한국 기업의 아르헨티나 지부장이랍니다. 보통 일년이나 이년 정도 해외파견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죠. 최근 들어서 IT 분야나 벤처산업 쪽도 아르헨티나로 많이 진출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지원협력을 담당하는 공공기관들도 진출해 있고 대기업들은 아르헨티나에 지부를 두고 운영하는 곳도 있어요. 지부장 정도면 50세 전후가 되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어서 대부분 가족들은 두고 혼자만 오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혼자 있기 외로우니까 서울에서 알던 애인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가끔 있는가 봐요."
가르시아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다다는 모든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이가 왜 아침까지 그의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는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녀가 집값이 가장 비싼 동네 중 하나라고 하는 레꼴레따 지역에 산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에요. 본인에게 확인하지 않았으니까요. 제 친구 생각이 그렇다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