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연태 푸른학원 설립자
▲ 노연태 푸른학원 설립자

'고등공민학교'는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어색한 교육시설이다. 그러나 초중등교육법에서는 엄연히 학교의 종류로 기재되어 있으며, 동법 제44조에는 고등공민학교의 목적, 수업연한, 입학 자격 등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 고등공민학교의 건립 목적은 무엇일까? 동법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의 교육을 받지 못해 취학연령을 초과한 사람 또는 일반 성인에게 국민 생활에 필요한 중등교육과 직업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교육의 기회 부족은 농어촌일수록 심했는데, 장봉도의 경우 지역 후학을 위해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푸른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장봉도의 장봉2리, 일명 평촌(坪村) 마을의 해안가 모래사장에 학교를 지었다. 도서 지역의 경우 초등교육은 대체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되지만 중등교육은 초등교육과는 달리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 후반~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장봉도의 중등교육 실태와 푸른 학원 설립

장봉도에 북도공립보통학교(장봉초등학교 전신)가 1935년 개교되어 초등교육이 시작됐지만 섬 내에서 상급학교 진학이 이뤄지지 못한 채 30여 년이 지난 1967년 첫 중등교육 기관으로서 '푸른학원'이 개교됐다. 즉 30년 동안 섬 내에서 진학이 이뤄지지 못한 공백기가 있었는데, 이 당시 졸업생은 인천 등 육지로 유학하거나 부모를 도와 어로(漁撈) 활동에 종사했다. 섬 내에 중등교육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실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교실은 파행과 무기력한 교육 현장이 되었고, 지역 후학을 걱정했던 지역 유지나 독지가의 출현으로 중학교나 비인가 학원을 세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 장봉도에서 학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노연태(1914~2000)였다. 그의 활동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아 학교 설립과 인연을 맺기까지 이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평남 진남포 출신으로 숭실고보를 졸업한 후 항해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8년(24세)에는 인천해운회사 연안여객선 선장으로 취임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고, 인천에서는 화도교회 권사, 찬양대 지휘, 주일학교 교사 등 왕성한 종교활동을 펼친 종교인이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인 1954년(40세)에는 삼목도에 이주하여 낙도 의료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65년 장봉도로 이사하였고, 마침내 1967년(53세)에 '푸른학원'을 설립했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당시 노연태는 데리고 있던 처자(處子)가 장봉도 남쪽에 있는 한들해변 부근의 '제비우물' 근처에서 동죽 등 조개 채취 활동을 하다가 우중의 낙뢰에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그는 유가족에게 위로금 40만 원을 전했지만 유가족은 오히려 되돌려 주면서 좋은 일에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는 유가족의 뜻을 기려 앞장술에 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노연태와 송두용의 인연과 만남

설립자 노연태의 뒤를 이어 1969년부터 1983년 2월 말 폐교되기까지 대부분은 송두용이 맡아 운영하였다. 노연태(1914~2000)와 송두용(1914~1986)의 만남은 송두용이 원인 불명의 병으로 고생하던 중 장봉도에 휴양차 머물게 되는데, 이때 노연태의 권유로 학교 운영에 관여하게 됐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한 종교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성서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실천했던 무교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종교적 동지였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