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며칠 전 충북 보은군에서 33개월 된 여자아이가 도랑에 빠지는 사고가 났다. 심정지 상태로 구조돼 병원에서 응급처치로 심장 박동이 관측되자 곧바로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을 요청했다.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7곳이나 되는 상급병원에선 받아주지 않았다. 병상이 없다는 이유였다. 마냥 시간만 흘렀다. 결국 소방당국까지 나서 상급병원 전체 11곳을 상대로 전원을 요청했지만 대전의 건양대병원 한 곳만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아이는 다시 2차 심정지가 온 상태에서 이송이 불가능했고 결국 심장 박동 관측 2시간여 만에 숨졌다. 조금만 더 빨리 전원이 됐다면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회한이 가슴을 치게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사 정원 확대와 지역 의료서비스 개선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최대 민생 현안이 된지 오래다. 역대 정부도 의사 정원 확대와 의료격차 해소를 국정과제로 삼았지만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어느 정부도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나온 배경이다. 문재인 정부도 의사 정원 확대에 나섰다가 금세 포기했던 과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어떨까. 윤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의사 정원 확대와 지역 의료서비스 개선에 국정운영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수십 차례의 토론회와 정부의 일관된 방침을 거듭 밝히면서 치밀하게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의사 정원 2000명 확대는 그 상징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오는 4월10일 22대 총선이 큰 부담이 됐을까.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20일 2025년도 의과대학 학생 정원 대학별 배정 결과를 발표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그리고 의정간 대화가 꽉 막힌 상황에서 내놓은 2000명 배정 결과 발표는 윤 정부의 치밀한 정책추진 성과처럼 비쳐졌다. 말 그대로 논란에 '쐐기'를 박는 것처럼 보였다. 이쯤이면 의사들이 정부의 방침을 수용하고 후속 협상에 나서면서 진료 현장에 복귀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의사들은 더 강하게 저항했으며 의료 현장은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는 며칠도 더 견디지 못할 분위기로 변했다.

총선 때문일까. 웬만해선 국민 앞에 잘 나서지 않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취임 후 세 번째다. 51분 동안의 담화에는 정원 2000명 확대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만 거듭 밝혔을 뿐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성찰도, 의정 갈등의 출구도, 정부의 방침을 실행할 로드맵도 없었다. 당장 여당에서도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윤 대통령의 탈당 요구도 나왔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정원 2000명에 매몰되지 않겠다며 외려 딴소리를 했다. 한마디로 여권은 지금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자중지란이다. 그렇다면 총선 후엔 어떻게 될까. 의사들의 입가엔 다시 엷은 미소가 피어오를 듯하다.

▲ 박상병 시사평론가
▲ 박상병 시사평론가

/박상병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