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포르투갈의 지방선거일. 아침부터 비바람이 몰아친다. 오전 내 투표장이 텅텅 비어 선거종사자와 정당 관계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점차 날이 개고 유권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투표율 90%. 상상도 못 했던 결과다. 개표를 시작하면서 더 큰 반전이 일어난다. 투표함에서 어느 후보에게도 기표하지 않은 백지투표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무효표가 무려 90%를 넘나든다.

1998년 노벨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2004년) 도입부다.

사라마구가 1995년에 내놓은 전작 <눈 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눈이 먼 사람들이 이 도시를 어떻게 지옥으로 만들었나를 그린 소설이다. 사람들이 눈이 머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눈 먼 사람을 스치기만 해도 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 코로나19는 저리 가라다. 전염성 안질환 팬데믹의 확산을 막기 위해 투입된 군인들조차 눈이 멀어 버린다. 끔찍한 광경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AI 알고리즘을 따라 맹목적 혐오와 증오에 쉽게 휩쓸려 들어가는 오늘 한국인과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디가 얼마나 다른가?)

<눈 뜬 자들의 도시>의 주제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민들이 맹목적 정치적 신념에서 벗어나 각성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눈 뜬…>은 <눈 먼…>보다 쉽게 읽힌다. 물론 전개가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다. 포르투갈 정부는 백지투표 90%인 지방선거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재투표를 실시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도시를 봉쇄하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너희가 정부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있나 보자. 웬걸,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정부가 존재했을 때보다 훨씬 더 평화롭게 안정적으로 살아간다. 결국 정부는 도심 테러 자작극을 벌이고….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게 되는 이유 역시 설명되지 않는다. 한 여인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시력을 회복했고, 시민들은 눈 뜬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다시 눈을 뜬다. 도시 전체의 회복속도가 눈이 멀어졌던 속도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맹목이 번지는 속도와 각성이 일어나는 속도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한국 22대 총선이 열흘도 안 남았다. '나는 각성이고, 너는 맹목'이라는 내로남불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땅이 '눈 먼 자들의 도시'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눈 뜬 자들의 도시'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진정 '눈 뜬 시민들'은 선거와 무관하게 서로 돌보고 도울 방법을 묵묵히 찾고 있을 게다.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