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문희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전 고려대 연구교수
▲ 송문희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전 고려대 연구교수

'갑질'이란 계약 권리상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 '질'을 붙여 만든 신조어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뉴욕타임스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영어로 표기한 'Gapjil'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중세 시대 영주처럼 부하 직원이나 하도급 업체에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국제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땅콩회향'이나 대기업 간부가 라면이 덜 익었다며 비행기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등 한국 사회에서 갑질의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면 꼭 권력을 지닌 사람만이 갑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입주민이 아파트 경비원에게 갑질을 일삼는 기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작은 권력이라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갑질 횡포를 부린다. 사회적 지위나 계층의 위계질서 사다리 안에서 을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갑이 된다.

부당한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당하는 약자의 자괴감과 굴욕감은 마음 깊숙이 상처로 남아 자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적으로 갑질 피해자가 되는 경우엔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 자존감의 상처로 고통받는다.

높은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권력'이란 상대방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런데 권력은 조망수용(perspective taking)을 방해하고 그 능력을 떨어뜨린다. '조망수용'이란 다른 사람의 생각, 지식, 감정 등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이다. 권력을 갖고 있다고 느낄수록 자기 관점 위주로 생각하고 타인의 관점에서는 멀어진다는 말이다.

권력은 정서를 처리하고 공감을 이끄는 뇌 전두엽에 영향을 미친다. 권력자에게는 뇌 전두엽 부위에도 변화가 생긴다. 약간의 권력만 가져도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고 쉽게 충동적으로 변한다. 이안 로버트슨의 <승자의 뇌>에 따르면 권력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해 자신감과 활력을 갖고 과감하게 행동하도록 한다.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만으로도 쾌락 물질인 도파민이 샘솟듯 분출된다. 이처럼 권력은 자기중심성을 강화한다. 성공은 자신이 잘난 덕분이고 실패는 남 탓이라고 믿게 된다. 권력 중독에 빠지면 뇌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기란 무척 힘들다.

권력에 취하면 타인과 동료를 괴롭히며 모욕을 더 많이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죄수와 간수 실험'에서 간수 역할을 부여받은 실험 참가자의 60%가 권력을 등에 업고 죄수 역할을 부여받은 실험 참가자를 고통스럽게 고문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권력이 공감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증명한 '알파벳 E 실험'도 흥미롭다. 연구자가 실험 참가자들을 '고권력자'와 '저권력자' 그룹으로 나눈 후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대문자 E를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고권력자' 실험그룹은 33%가, 저권력자 실험그룹은 12%가 자신이 쓰기 편한 방향으로 E를 그렸다. 권력을 가지면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게 하는 거울뉴런이 잘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거울뉴런'은 타인의 말을 듣거나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서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신경세포다.

권력에 취하면 오만해지고 배려심이 적어지는 것은 인간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자 로버트슨은 “모든 인간, 특히 권력자들은 자신의 자아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끝없이 조심하고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타인의 권력 갑질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는 내 수중에 있는 권력을 제대로 잘 사용하고 있는지, 나도 권력 중독자가 아닌지 늘 깨어있는 눈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맹목적인 권력 추구 욕구만 지닌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의 추구의 욕구 또한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선택은 나의 몫이다.

/송문희 경기도어린이박물관장∙전 고려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