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마지막 인사는 '감사'와 '행복'이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남기고 정 추기경은 영원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선종서한을 남겼다. 두 분은 자신의 행복에 앞서 타인의 행복을 기원했다. 자아정체감 이론을 정립한 에릭슨의 '자아통합' 경지에 이른 성인의 삶답다.

절망하지 않고 삶에 만족하며 아름답고 가치 있는 생을 마감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순간, 허전한 천장 불빛에 고정된 시선이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 '행복'을 거론하고 수용하는 긍정적인 종말이 평범하지 않기에 서거기사는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된다.

부고(訃告)는 인생의 마지막 알림이다. 정작 고인은 경험할 수 없는 일생일대 사건이다. 인간의 죽음 자체가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 앞에 오만하다. 사망기사(obituary)는 한 인간에 대한 짤막한 평가이고, 사회적 기억이며 기록이 된다. 하지만 부고는 유력 인사들에게나 할애되고, 장례와 빈소를 알리는 정도로 신문 코너를 장식해 왔다. 공시성 부고 단신은 있으나 한 사람의 삶을 응축하는 부고기사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부고기사의 전통을 이어온 정론지다. 지난해 5월 코로나19 사망자가 10만명에 육박하자 1000명의 희생자 부고기사를 4개면에 걸쳐 다뤘다. '그들은 우리였다' 부제를 단 1면 전체 부고기사는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사망자 한 명 한 명마다 개인의 특성이 돋보이고 위트가 넘나드는 문구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백미였다. 넉넉지 않은 지면에 한 인간의 특성을 묘사하기란 대단한 에너지와 역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미 대표 언론의 부고기사 작성은 연륜을 갖춘 기자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뉴욕타임스 부고기사 편집자 윌리엄 맥도널드도 퓰리처상 수상 등 30여년의 기자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으로 알려진다.

가끔 공인 언론의 부고기사 오보도 발생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미리 써둔 부고기사로 고인이 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고인의 구체적인 삶의 스토리를 함축하려면 특정 인물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놓는 관행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두고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The Last Word, 2017)'이 작성되는 셈이다. 'The Last Word'는 수년 전 개봉한 마크 펠링톤 감독의 작품이다. 원로여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우리와 친숙한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열연했다. 해리엇(셜리)은 광고 에이전시 대표로 은퇴했지만 고집 세고 괴팍한 할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작성하기 위해 부고전문기자 앤(아만다)을 고용한다. 완벽한 사망기사 작성을 위해 해리엇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역할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황혼에서 악평을 호평으로 바꿀 부고기사에 대한 기대에서다.

평균수명이 연장된 고령사회에서 '노인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도 확산되는 시대다. 자서전은 유명인들의 전기 혹은 위인전과는 성격이 다른 보통 사람으로서의 일생을 기록하는 자기발견이다. 삶의 작가이고 연기자이며 감독인 스스로가 소중한 인생의 의미 찾기에 나서는 작업이다. 자서전은 여생을 설계하는 길잡이로 활용된다. 사회적으로는 가족의 역사를 전수하는 유산이며,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가 된다.

이와 달리 죽어야 게재되는 부고기사는 사후 인터뷰와 같다. 한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재해석해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담는다. 언론의 고인에 대한 평가는 건전한 삶의 구축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 생전의 인식이고, 사후의 경험이다. 사거(死去)든 서거(逝去)든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동일하다. 모두 아름다운 죽음으로서 웰-다잉을 희망한다. 그래서 평범한 소시민의 죽음 역시 소중한 사건이 된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인천과 함께한 당신을 기억합니다.' 인천광역시가 지역신문과 협력해 '추모기사 게재사업 공동캠페인'을 추진한다. 인천시민의 부고기사는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과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빈소 공지 또는 추모 중심의 천편일률적인 부고기사를 새로운 저널리즘의 영역으로 재탄생시킬 기회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