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과오 드러내 일본 지식인 사회 뒤흔들다

과거사 사과 없는 한일협정 추진에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출간
큐슈 이즈카 탄광서 유명 달리한 동포 유골 16구 관음사서 찾아내
태평양전쟁 말기 대본영 지하호 공사서 수백명 학살당한 사실 밝혀
우타시나이 탄광 인근 묘오지·묘호지서 총 241명 사망자 명부 확인
▲ 말년의 박경식 교수. /사진제공=일본 민단신문
▲ 말년의 박경식 교수. /사진제공=일본 민단신문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5년, 일본에서 한 권의 책이 오랜 침묵을 깨고 조선인의 강제연행 피해를 세상에 알렸다. 젊은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이 책을 낸 사람은 박경식(1922~1998년) 도쿄도 조선대학교 교수로, 이미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일일이 인터뷰하고 현장조사를 해 온 결과물이었다. 박경식 교수뿐 아니라, 일본인인 햐야시 에이다이 선생, 재일사학자 김광렬 선생 등도 평생을 바쳐 강제동원 피해를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각각 수십권씩의 책으로 나왔다. 이들은 일본의 탄광, 천황을 위한 지하대본영, 군함도 등에서 고향을 그리며 죽어간 조선인들의 억울함을 정확하게 알리려 했다.

▲ 고 박경식 저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표지.
▲ 고 박경식 저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표지.

◇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를 처음 발표한 재일사학자 박경식 교수

박경식 조선대학교 교수는 1964~1965년 진행된 한일협정 사전회담이 '과거사에 대한 사과 없이' 진행되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352쪽 분량)' 저서를 일본어로 발표했다. 강제연행의 참혹한 진상을 낱낱이 고발한 이 책은, 그 자체가 일본이 피해갈 수 없는 범죄의 기록이었다. 치밀한 증거 수집이 뒷받침됐다.

이 책은 발간된 후, 한국보다 먼저 일본인 지식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젊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나 배상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책을 보고, 양심있는 일본인들은 조선인 강제연행의 과오를 알게 되었고, 후일 일부 일본인들은 박 교수의 제자가 되어 함께 연구작업을 하기도 했다.

▲ 큐슈 야하타 시에 있는 조선인 토목인부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38쪽).
▲ 큐슈 야하타 시에 있는 조선인 토목인부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38쪽).

◇ 가장 많은 조선인 유골이 산재한 큐슈 탄광

“1962년 8월 큐슈 이즈카 탄광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후쿠오카시에서 버스를 타고 이즈카로 갔다. 그리고 이 지역에 해방 이전에 연행되었다가 죽은 동포의 유골이 많이 방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몇 군데 사찰을 찾아가 보았다. 수소문끝에 알아낸 것이 시내에 있는 관음사라는 사찰이었다. 주지에게 물어보니 조선인연맹이 당시 가까운 탄광에서 유골 수백 구를 모아 위령제를 지내주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귀국하는 동포가 가지고 갔으며 아직도 일부가 남아있다고 했다. 이는 인도적인 문제라 빨리 고향에 보내주고 싶다면서 잠가 놓은 본당 문을 열고 유골이 안치된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주지는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동포의 유골을 찾아주었지만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해서 먼지가 수북이 쌓였고 일부는 상자가 부서져 뼈가 밖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아무튼 여기에서 유골 16구를 찾았다. 나는 상자에 적혀 있는 이름을 베껴 썼다. 먼지로 손이 새까맣게 되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유골의 주인은 얼마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부모형제를 그리워 했을까. 또 얼마나 심한 고통을 참으며 일해야 했을까. 그런데 죽어서도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채, 사찰 한 모퉁이에 몇 십년씩이나 버려져 있었으니. 분이나 가슴이 메었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187쪽)

▲ 기시와다 방적의 조선인 여공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38쪽).
▲ 기시와다 방적의 조선인 여공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38쪽).

◇ 기밀누설 방지, 수백명 학살 천황의 지하대본영

“나가노시 근처에 있는 마쓰시로에서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본토의 최후 결전장으로 대본영 지하호를 파는 대공사를 했다. 1944년 11월부터 1945년 8월 일본 패전까지 2억엔 예산으로 연인원 300만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어 기사야마에서 마이즈루야마, 미나카미야마까지 바둑판무늬 같이 파낸 11㎞의 지하호 토목공사였다. 여기에 강제연행된 조선동포 수천 명이 나시마쓰구미에 배속되어 헌병의 감시 아래 노동을 했다. 이들중 기밀장소를 판 수백 명은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행방불명인 채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당시 군부의 지배층이 기밀을 은폐하기 위해 동포를 학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208쪽)

한편 박경식 교수의 발표 이후 추가조사 결과, 지하대본영 공사에는 일본 전국에 징용 중이던 조선인 6000여명도 포함됐는데, 열악한 노동조건 및 공사기간 단축에 따른 무리한 작업으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조선인 인부들이 요구받은 것은 공습시 일왕이 내려가 몸을 숨길 지하궁궐을 만드는 것이었다. 폭 4m, 길이 51m에 이르는 동굴이 일왕의 대피소였다. 전쟁 후에도 대피소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마을 주민들조차 이 지하터널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대본영 지하 벙커 건설공사에서 희생된 300여명의 한국인을 추도하기 위한 기념비가 공사가 중단된 지 50년이 지난 1995년에 세워졌다.

▲ 가마이시 쇼후쿠 절에 있는 조선인 유골(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42쪽),
▲ 가마이시 쇼후쿠 절에 있는 조선인 유골(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42쪽), 

◇ 홋카이도 우타시나이 지구 탄광, 241명이 사망

“우타시나이 지구로 가서 해방 전부터 갱부 일을 한 김세봉씨의 부인을 만났다. 김씨는 1942년에 이곳으로 온 후 4번이나 도망을 갔으나 매번 붙잡혀 왔다. 부인은 마쓰시마구미에서 취사부로 일했는데 간부들에게는 흰 쌀밥을 주고 일반 노동자에게는 잡곡밥을 주었으며, 밤이 되면 기숙사에 자물쇠를 채워 어떤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나와 일행은 이곳의 묘오지, 묘호지를 방문해 사망자를 확인했다.

묘오지의 과거장부에 1939~1945년의 조선동포 사망자는 154명으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1943~1945년이 114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산별로 보면 가모이 56명, 소라치 34명, 가미우타 24명, 우타 20명, 기타 20명으로 되어 있었다.

또 바로 옆의 묘호지에도 87명의 사망자 명부가 있었고, 이 명부에서도 1944~1945년의 사망자가 76명이었다. 큰 사고였던 1944년 10월 19일 가모이광산 동쪽 갱의 폭발사고로 17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11명이 조선인이었다.(중략) 사찰에는 이들의 유골이 없었다. 인수자가 없는 유골은 묘호지 뒤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형식뿐인 나무팻말만 세워져 있었다.”('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180쪽)

▲ 히타치 광산에서 사망한 조선인 유골(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42쪽).
▲ 히타치 광산에서 사망한 조선인 유골(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342쪽).

◇ 박경식 교수의 생애

박경식은 19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나 1929년 부모와 함께 일본 오이타현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박경식은 일본에 머물고 가족은 귀국했다. 1940년 오이타현 사립 슈세쓰교를 졸업하고 1943년 니혼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를 졸업했다. 1945년 12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에 가입했고, 1946년 6월 재일본조선인연맹으로 옮겼다. 1946년 도요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편입했고, 1949년 졸업 후에는 도쿄 조선중고등학교의 사회과 교원이 됐다. 이후 조선연구소에서 전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58년 조선학교 교원으로 복귀한 뒤 1960년 4년제 대학이 된 조선대학교로 옮겼다.

1965년 재일 한인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을 출간해 크게 주목을 끌었다.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은 50쇄가 넘게 출간됐고, 일본 사회에 조선인 강제 연행의 실태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조선인 강제 연행 연구는 당시 소속되었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및 조선대학교 측과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1970년 대학을 떠나 재야 역사가로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박경식은 1976년 강제연행에 대한 구술과 청취, 채록 작업 등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운동사연구회를 조직했다. 박경식은 전국 각지에서 관련 사료를 꼼꼼히 수집하고, 정리해 자료집과 총서 형태로 간행하였다. 박경식이 일생 동안 수집한 자료는 사후 시가현립대학에 기증되어 박경식 문고로 보관돼 있다. 그의 1973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日本帝囯主義の朝鮮支配]', 1976년 '천황제국가와 재일 조선인'은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인 피해에 대한 문제점이 잘 담겨 있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인천일보-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