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뒤처진 항만서 수도권 산업단지 '젖줄'로

일제, 1918년 제1도크 만든 후
1935년 8000t급 출입 도크 착공
태평양전쟁 여파로 1943년 중단
무역선 대형화 추세 못 따라잡아

1963년 인천 정재계 및 시민사회
경인지역개발추진위 준비위 꾸려
조속한 2도크 축조 목소리 높여

정부, 수출형 산업화 드라이브 걸며
원자재 수입·생산품 수출 항만 필요
1966년 6월1일 2도크 기공식 갖고
1970년 연 480만t 하역 능력 목표로
시민 숙원 '현대적 항구' 도약 첫걸음
경인운하 계획 맞물려 '대역사' 확대
▲ 제2도크가 축조되기 전의 인천항 전경. 전면의 사각 도크가 제1도크이고 뒤쪽의 넓게 보이는 곳이 1943년 태평양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던 인천항 제2도크 예정지이다. 1966년 4월 제2도크 공사를 재개했으나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잇는 인천항 전면 도크화 공사로 설계가 변경되었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제2도크가 축조되기 전의 인천항 전경. 전면의 사각 도크가 제1도크이고 뒤쪽의 넓게 보이는 곳이 1943년 태평양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던 인천항 제2도크 예정지이다. 1966년 4월 제2도크 공사를 재개했으나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잇는 인천항 전면 도크화 공사로 설계가 변경되었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직전의 제35화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화시대의 서막인 1960년대를 열면서도 인천항은 여전히 전 시대 그대로의 항만 낙후와 더불어 여러 가지 부조리와 어두운 그늘을 잉태하고 있었다. 물론 서민 절대빈곤에서 비롯된 부조리는 경제 발전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만의 정비와 확충이 시급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천항의 현실이었다.

▶관련기사 : [현대사 한바퀴] 제35화 산업화 시대 1. 1960년대를 여는 인천항의 명암(明暗)

실제 1966년 제2도크 건설을 계획하기 전까지는 인천항은 우리나라 관문 항구라는 구호(口號)만 요란했을 뿐이었다는 것은 이 연재 중, 누차에 걸쳐 언급했던 말이다. 항만 기능의 빈약으로 인해 대형 선박의 외항 정박에서부터 하역 시설 또한 원시적인 형태를 면치 못했다는 내용 역시 여러 번 밝혀 썼었다.

▲ 1965년 착공된 인천수출산업공단 조성 기공식 장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이어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거 수출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인천수출산업공단를 비롯해 수도권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원활한 원자재의 수입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서는 항만의 확충, 곧 인천항 제2도크 축조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1965년 착공된 인천수출산업공단 조성 기공식 장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이어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거 수출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인천수출산업공단를 비롯해 수도권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원활한 원자재의 수입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서는 항만의 확충, 곧 인천항 제2도크 축조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이제 한 번 더 반복하거니와, 세계적으로 무역선의 선복량(船腹量)은 점차 대형화하는 추세임에도 인천항은 일제가 3000t급, 4500t급 선박 3척이 접안할 수 있게 축조한 제1선거뿐이었다. 그나마 원조의 힘으로 1959년 7월 말부터 1년여에 걸쳐 도크 정비 공사를 했다고는 해도, 그 당시 이미 1만t급 이상의 선박을 손쉽게 접안시킬 수 있었던 부산항에 비하면 인천항은 대형 선박의 입항, 하역, 수송 등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뒤떨어진 항만이었다.

그렇다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이어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인천항의 오랜 숙제를 해결하는 계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군사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수출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무엇보다 절실하게 대두되었던 것이 항만의 완비였다. 특히 인천항은 그 배후에 인천수출산업공단을 비롯해 수도권 산업단지를 두고 있는 만큼 원활한 원자재의 수입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서 항만의 확충, 곧 제2선거 축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필연이었던 것이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인천항 제2도크 축조나 산업시설의 지역 유치가 지역경제 발전의 관건이라 보고 경인지역개발추진위원회 준비위원회를 1963년 12월 22일 결성하였다. 아울러 준비위원회는 부평에 공업단지 조성, 경인철도 복선 및 전철화 추진과 함께 인천항 제2도크 축조에 대한 정부 계획을 적극 후원하며 촉진할 것을 중점 목표로 잡았다. 더욱 적극적인 추진을 위해 각계 인사 68명이 모인 자리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유승원(柳承源) 국회의원, 부위원장에 이덕근(李德根)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최정환(崔正煥) 동일방직 상무이사, 허합(許合) 인천신문 사장 등이 선임되었다.

경인지구종합개발추진위원회는 발족하기가 바쁘게 인천항 제2도크 축조를 조속히 착수해 주기를 바라는 건의서를 중앙 요로에 제출하고 건의단을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중앙정부에서도 그동안 계획 추진에 미온적이던 태도를 수정하여 인천항 도크 축조 공사의 필요성을 파악코자 살펴본 바 있었고, 실제 1966년 4월 '루이스 버거' 용역회사의 현지 조사가 실시되어 제2도크 축조의 타당성이 입증, 제시됨으로써 2만 톤급 대형 선박을 접안시킬 수 있는 제2도크의 축조 계획이 세워지고 착수하게 되었다.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의 내용이다.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당시 제2도크 축조에 대한 인천시민 및 지역 상공업계의 혜안과 더불어 열망과 비원을 오늘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제2도크 축조는 자본적인 면이든, 기술적 측면이든, 인천 지역민 자체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국가적 사업임에 틀림없으나, 정부의 처분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 우리 선배 인사들, 시민들의 적극성과 열의를 역사적으로 조명하려는 뜻이다.

▲ 1966년 6월1일 오전 10시30분, 인천시민의 오랜 숙원이자 국가적 염원이었던 인천항 제2도크 기공식이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다. 박 대통령이 발파 스위치를 누르는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1966년 6월1일 오전 10시30분, 인천시민의 오랜 숙원이자 국가적 염원이었던 인천항 제2도크 기공식이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다. 박 대통령이 발파 스위치를 누르는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이 같은 인천 지역 여론의 비등 때문이었는지, 인천항의 정비 필요성에 대한 현실적 깨달음이었는지, 1965년 3월12일, 그동안 '미온적이던' 건설부가 떠밀리듯 12억원의 예산을 들여 인천항 제2도크 축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66년 6월1일 오전 10시30분, 인천시민의 오랜 숙원이자 국가적 염원이었던 인천항 제2도크 기공식이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다. 도하 각 신문이 다투어 이날 기공식을 주요 기사로 다루는 중에 이날의 행사를 특필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다시 읽어 본다.

▲ 제2도크 공사 시작을 알리는 기공(起工) 발파 광경./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제2도크 공사 시작을 알리는 기공(起工) 발파 광경./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인천 제2도크 축조 기공식이 1일 오전 10시 반, 박 대통령을 비롯한 내외 귀빈 및 인천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종합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이제 2도크 축조는 서울, 인천 특정지역 개발사업의 일부로 착공되는 것으로 인천항의 하역 능력을 337만 톤 더 늘리기 위해 57억 원의 예산을 들여 70년까지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인천항은 조석(潮汐) 간만의 차가 10m나 되는 좋지 못한 조건하에서 도크 시설의 미비로 각종 물자의 하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연간 93만 톤) 큰 선박의 접안도 불가능한 형편인데 제2도크가 준공되는 70년에는 2만 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으며 연간 480만 톤의 하역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치사(致辭)를 통해 “6·25동란 이후 거의 군사적 목적만을 위한 항구였던 인천을 정부와 국민이 합심하여 현대적 항구로 만들자”고 격려하고 이어 앞으로 “정부는 경인운하를 팔 계획이며 또 한강을 적극적으로 준설하여 수송력을 증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1971년 무렵 소월미도와 월미도 사이를 메우는 매립 공사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1971년 무렵 소월미도와 월미도 사이를 메우는 매립 공사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이로써 인천항은 23년의 숙원을 푼다. 1918년, 제1도크가 축조되고 인천항이 국내 제1의 항만으로 발돋움하자 일제는 1935년에 8000t급 이상의 선박 출입이 가능한 제2도크 축조에 착수한다. 그러나 도크 증설은 외곽공사에 이어 대략 30%의 축조 공정을 보이던 중, 1943년에 태평양전쟁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후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황폐의 길을 걷던 인천항은 결국 1966년 6월1일, 기공식을 가짐으로써 비원(悲願)의 '현대적 항구'를 향한 축조공사의 본격 시작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초의 제2도크 공사의 골자는 ‥인천광역시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갑거(閘渠)를 2만 톤급 1기, 8000 톤급 1기에 갑문 4연을 추가로 설치하고, 안벽 3820m를 축조, 2만 톤급 2척, 1만 톤급 2척, 8000 톤급 5척, 5000 톤급 10척 등 총 19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하는 선거로 개발하여 하역 능력을 연간 480만 톤으로 늘리는' 대단히 비약적인 것이었다.

▲ 두 번의 설계 변경의 곡절을 겪은 인천항 제2도크 갑문 공사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두 번의 설계 변경의 곡절을 겪은 인천항 제2도크 갑문 공사 장면./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이 5년간에 걸친 인천항 대역사(大役事)의 시작을 기록하면서, 글 앞머리에 '당초'라는 표현을 쓴 까닭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나, 이 제2도크 공사는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처음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당초'라는 어휘를 쓴 것은 그런 까닭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이날 기공식장에서 행한 박 대통령의 치사(致辭) 중에 “정부는 경인운하를 팔 계획이며 또 한강을 적극적으로 준설하여 수송력을 증대할 방침”이라는 내용 역시 당초의 제2도크 축조 계획을 바꾸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제2도크 공사가 아니라 인천항 전면 도크화로의 항만 축조 계획의 변경과 그에 따른 공기의 연장 등, 자세한 내용은 다음 이야기로 미룬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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