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장 몰락 설움 “조선독립만세” 외침 키웠다

경부철도 이후 상공업 무너져
안성공립보통학교서 만세 시작
상인·기생까지 나서 격렬한 저항

안성 서부 일본 관서·업소 파괴
순국 26명·투옥 177명 등 아픔
1인당 2000만원 손배 부담 막대
▲ 안성시와 관련 시민단체 등이 2019년 4월2일 안성3·1운동기념관 인근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제공=안성시청

일본이 경부철도 개설과 함께 유통구조를 개편하면서 안성 지역 경제 근간이 흔들렸다. 이 때문에 일본에 대한 안성 민중의 저항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1919년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열흘 뒤인 11일 안성에선 첫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안성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무혈항쟁으로 이어졌다.

 

▲ 안성 민중 저항의식 키운 '경부철도'

일본의 경부철도 중심 장시정책으로 당시 안성 민중의 저항의식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철도에 편입된 평택 등 인근 도시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안성은 상대적 박탈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안성의 만세 항쟁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격렬했을 것이란 학술적 평가가 나온다.

오환일 전 유한대학교 여성교양과 교수가 저술한 안성의 얼과 맥에 따르면 1905년 경부철도가 개통하면서 안성에선 폐업하는 객주가 늘었다. 또 시장세 등이 신설되면서 값싼 도자기 제품이 대량 유통됐고 유기공업을 대표하던 안성의 상공업은 무너졌다.

구 양성군 읍내에서 1910년대 초에 열리던 양성장(4·9일)은 폐지됐다. 이때 지역민들 불만이 높았는데, 이는 1920년대까지 이어진다.

동아일보 1928년 11월4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성군 양성면 동항리는 구 양성군읍이던 바, 대정 3년[1914]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안성군에 병합 동시에 양성시장까지 철폐되어 이래 십수년 간 동지(同地)는 나날이 쇠퇴. 금일에는 한미한 소촌락이 돼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궁경에 함(陷)했으므로 당지 유지들은 동지(同地)의 발전책을 강구하던 바 시장을 설치 함이 가장 유리하겠다는 의견으로 금번 양성시장 설치에 대해 당국에 진정”이라고 보도했다.

안성지역 시장(장터) 몰락으로 민중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극도로 높아만 갔다. 이런 와중에 1919년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사진제공=안성시청
/사진제공=안성시청

▲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 항쟁…'2일' 동안 해방 공간으로

3·1만세 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만세 항쟁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구 안성군의 중심지이자 안성장이 열리는 안성읍내부터 구 양성군 지역인 양성면과 원곡면, 구 죽산군 지역인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 등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따르면 안성읍내에선 1919년 3월11일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이날 밤부터 안성장 상인 수십명은 만세를 불렀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안성읍내에서 같은 해 3월28일부터 4월2일까지 연속해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상인은 물론 기생까지 나서며 일본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양성면과 원곡면의 경우 주민들이 촌락공동체의 운영 원리를 바탕으로 마을 단위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근대적 전신시설인 우편소, 전주 등을 주로 공격했다. 심지어 평택 철로 파괴까지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지역도 상황은 비슷했다. 죽산군에선 4월1일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명이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이죽면 두현리에선 도로 수선 부역에 동원됐던 인부들이 만세를 부르자는 선동이 있었다. 이죽면 장계리의 경우 주민 수백명이 죽산리 소재 죽산 경찰관주재소와 이죽면사무소로 몰려갔다.

4월2일 오전부터 4월3일 새벽까진 죽산시장에서 대규모 만세운동 일어나면서 이죽면 죽산리 중심가 일대가 뒤흔들렸다. 이날 이죽면 장원리, 매산리, 용설리, 장계리 등지에서 모인 주민 수천명은 죽산리 죽산시장 일대로 모여 만세를 불렀다.

죽산경찰관주재소, 죽산우편소, 이죽면사무소, 죽산공립학교 등에서도 시위가 벌어졌고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수십명도 죽산시장과 죽산경찰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결과 안성 서부 지역은 해방을 이뤘다. 4월1일 밤 원곡면 주민 1000여명과 양성면 주민 1000여명이 일본 통치 관서인 경찰주재소를 비롯, 우편소, 통신전선, 면사무소, 일본인 업소 등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경찰주재소의 경우 일본 통치권 행사와 보안의 핵심 기관이었다.

이 과정에서 현장과 옥중 등 전체 26명이 순국했다. 41명은 태형에 처했다. 177명은 투옥되면서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으며 옥고를 치렀고, 1인당 최고 409엔(현재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2000만여원)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부담하게 됐다.

홍원의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사는 “안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격렬하기로 전국에서 손에 꼽았다. 기생까지 나서 시위를 벌인 정도”라며 “원인이 명확하진 않지만, 당시 안성의 경제가 경부철도로 크게 위축되면서 생긴 불만이 만세 항쟁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명종·김기원·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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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안성맞춤박물관 독립운동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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