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철도역 유통 간선·거점 역할
안성장, 지역시장 전락 … 갈수록 침체
경부철도 인근 평택은 상업 요충지로
1925년 안성선 개설 … 1989년 폐선
경부선 중심 유통구조에 한계 절감
조선을 침탈한 일본은 경부철도 중심으로 유통구조(5일장)를 재편했다. 이 때문에 경부철도 노선에서 제외된 안성의 지역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졌고, 경부철도 노선에 편입된 평택은 신흥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안성 민중들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철도역 중심으로 유통구조 재편…안성 '결정타'
일본은 경부철도 개통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존 유통구조를 재편하려 했다. 이 때문에 경부철도 노선에서 빠진 안성은 그대로 경제적 피해를 받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일본은 경부철도 개통 이후 각 지역 유통구조를 경부철도 노선 중심으로 재편했다. 경제적 수탈과 군참 기지화 등이 목적이었다. 이에 일본은 기존 상품유통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장시를 철도운송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각지의 철도역장에게 철도 선로에 있는 개별 시장의 화물 집산상태, 운송 관계, 시장 부근 생산물, 기타 관련 사항 등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철도와 철도역이 상품유통의 간선이자 거점으로서 기능하는 정도를 파악하려 한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방식으로 경부철도 부설 초기 장시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철도, 정거장을 통해 우리나라의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결과 경부철도 중심으로 유통구조는 재편됐고, 상업중심지였던 안성장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축소됐다.
▲인접한 평택은 상업중심지로 급부상
일본은 경부철도 개설과 함께 모든 물품의 운반 중심지를 철도역이 속한 도시로 발 빠르게 재편했다. 그 결과 안성은 지역 경제 성장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고, 평택은 새로운 요충지로 자리 잡게 됐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에 따르면 당시 안성시장으로 모이는 곡류 대부분은 평택역으로 운반됐다. 이후 평택에서 경부철도를 통해 각지로 보내졌다. 이처럼 철도 위주의 상품유통구조가 확립되면서 평택은 상업 중계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저술한 1910년대 경기 남부지역 상품유통구조 논문을 살펴보면 평택장은 1920년대 후반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둔포장보다 시장거래액이 높았다. 1928년 평택장 시장거래액이 34만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전국 1호 시장 1330기 중 상위 8%내에 드는 규모다.
물론 시장거래액 규모로 볼 때 평택장은 안성장보다 적었다. 다만 안성장의 연간 시장거래액을 들여다보면 안성장은 우시장 덕에 유지된 것으로 분석된다. 농산물 집산 시장으로서 기능은 거의 상실됐다. 재래공업 역시 마찬가지다. 1922년 간행된 경기도사정요람을 살펴보면 안성시의 재래공업에 대해선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안성장이 '지역내 시장'으로 바뀌면서 성장의 한계가 뚜렷해진 것이다.
1925년 김태영이 저술한 안성기략에 따르면 안성장은 철도 부설 이후 삼남지방의 물산이 집산돼 경성 이북으로, 함경·강원 각도의 물산이 안성을 경유해 경성으로 보내지던 모습은 당시 거의 사라지게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후 안성은 상업도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철도 개설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25년 안성~천안 안성선이 개설됐지만, 기존 경부철도 중심으로 형성된 유통구조만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안성선은 이용객이 적은 탓에 개설된 지 64년만인 1989년 폐선됐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당시 안성시민들은 경부철도 개통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소외감과 불만이 커졌다”며 “이는 일본의 철도 중심 장시 정책 탓에 안성의 지역 거점으로서 기능이 점차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어 “이후에 안성시민들이 철도부설을 요구하며 안성선을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미 공고해진 유통구조 속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오늘날 안성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이 같은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명종·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인터뷰]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철도중심 시가지 형성 안성시민은 박탈감"
철도유치 요구, 과거사 검토 뒤 풀어가야
“경부철도 개통 이후 일본의 장시 정책이 기존 유통구조를 바꿔놓았죠. 안성시민 입장에선 상대적 박탈감이 들 수밖에요.”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경부철도의 수요를 증가하기 위해 장날 요금을 깎아주는 등 이점을 줬다. 그렇다 보니 철도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됐고, 전통적 중심지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허 교수는 5일장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회를 연구하는 등 국내 몇 없는 전문가다. 안성시의 사례를 다루며 경부철도 개설 이후 안성장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연간거래액을 통해 분석한 적도 있다.
경부철도 개통 이후에도 안성장은 1930년대까지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했다. 다만 평택의 철도를 통해 물자가 이동됐고 안성은 '지역내 시장'으로 축소됐다.
이 때문에 안성시민들은 철도 개설을 요구한 끝에 1925년 안성선이 개통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경부철도 중심의 유통구조에 종속되면서 1989년 끝내 폐선됐다.
허 교수는 “정확히 따지면 안성이 양적으로 연간 거래액이 줄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인 유통망이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경제 성장의 한계는 뚜렷했다”며 “후에 안성선이 개설된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안성사람들이 이러한 변화나 위기감을 크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이 같은 안성의 역사적 배경이 1919년 4월 항쟁, 현재 철도 부흥 운동 등에 일부 반영됐다고 봤다.
허 교수는 “안성에선 당시 손에 꼽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적인 측면이 주된 이유이지만, 전체적인 흐름 속에 안성의 상황과 같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어 “현재 안성에서 철도 개설 요구가 들끓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이어지고 있다”며 “다만 단순히 철도가 없기에 혹은 지역 미래를 위해 철도를 놓아야 한다면, 안성선과 같은 결과가 되풀이할 수 있다. 과거 경험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현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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