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의 '사불삼거' 조선시대에만 필요했을까
▲ 정조가 친필로 선생에게 내린 비답(批答, 신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 중 앞부분. “네가 올린 소를 잘 보았다. 네가 아뢴 13조는 모두 백성과 나라의 실용에 관계되었더구나. 너는 필시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달하지 못한 사람이겠구나”라 하고는 조목별로 상세히 그 타당성을 검토하였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 정조가 친필로 선생에게 내린 비답(批答, 신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 중 앞부분. “네가 올린 소를 잘 보았다. 네가 아뢴 13조는 모두 백성과 나라의 실용에 관계되었더구나. 너는 필시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달하지 못한 사람이겠구나”라 하고는 조목별로 상세히 그 타당성을 검토하였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의원님 말씀하신 것처럼 읍참마속하는 자세로…” 투기한 LH공사 직원을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요절내겠다는 국토교통부 장관님 말씀이란다. 우하영 선생의 <천일록>을 연재해서 그런지 LH공사 일이 더 각별히 다가온다. 그런데 LH공사 사장을 지낸 저분의 말씀이 하 어이없다. '읍참마속' 한 마디로, 졸지에 장관님 자신은 제갈량이요, 땅 투기를 한 LH공사 직원은 마속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개도 웃다 슬퍼할 일이다. 마속은 애국심과 사내다운 기개가 대단한 장수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섰지만, 제갈량의 전략을 어기고 패했다. 그렇기에 제갈량 역시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베었다.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속임종여량서(謖臨終與亮書)>라는 글을 올리고 죽음을 기다렸던 마속이 저승에서 통탄하고, 이승에선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글자가 쥐구멍을 찾을 노릇이다.

차설(且說)하고 우하영 선생의 말씀을 경청해본다. '건도'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나라를 경영하는 데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경상도 양반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지금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선생은 경상도 양반들은 치산(治産)을 먼저 하고 문예를 닦기 때문에 과거나 벼슬에 연연치 않으며, 벼슬을 하지 않아도 가업을 이을 수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 급제를 못하면 빈궁한 처지로 떨어지는 경기도 양반들의 삶과는 대조적이었다.

'치관'(置官)에서는 우리나라 신라 아찬(阿 )부터 각 관청 및 관작의 설치 내력을 다루었다. 선생은 관리를 이천부모(貳天父母)라며 “일을 해나가는 방법은 참다움 한 가지뿐이다. 자애로운 어머니만이 품에 있는 아이의 아프고 가려운 곳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일부 관리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 재임 중 네 가지를 하지 말며 세 가지를 거절한다)'를 불문율로 삼았다. 재임 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四不)는 첫째, 부업을 하지 않고 둘째, 땅을 사지 않고 셋째, 집을 늘리지 않고 넷째,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 것이다.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三拒)는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경조사의 부조다. 실제로 청송 부사 정붕은 영의정이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다”고 거절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명 한 필을 보낸 지방관에게 벌을 주었다. 풍기 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사표를 낼 정도였다. 대제학 김유는 지붕 처마 몇 치도 못 늘리게 하였으며, 조선의 공무원 김수팽은 아우의 집에 들렀다 마당에 놓여 있는 염료 항아리를 모조리 깨뜨려버렸다. 염료 항아리를 깬 이유는 이렇다. “이놈아! 그래도 너는 말단 관리지만 입에 풀칠은 하잖니. 네 아내가 염색업을 부업으로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어찌 살란 말이냐.”

제2책은 '전제'·'병제'로 구성되었다. 토지와 군사를 유기적 관계로 파악한 것은 유형원이 주장한 농병일치설인데 선생은 이를 체용(體用)이라 한다. 전제가 체(體)고 농정은 용(用)이다. '전제'에서는 주나라의 정전제 및 우리나라의 역대 토지 제도·공물 제도(貢物制度)·농정 등을 논하였다.

선생은 국가의 이해득실과 백성의 평안은 제도가 아니라 “오로지 제대로 된 관리”(專在得人)에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익처럼 선생도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굳게 믿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에서 농업이 가장 우선이라고 하였고 왕정의 근간도 농사에 힘씀이라고 하였다. 수령칠사란,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할 때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으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농상성(農桑盛,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아울러 농지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는 양전제(量田制)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리고 농지 확보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농토 개간과 더불어 광작하는 대농경영을 보다 집약적인 소농경영으로 전환시킬 것을 주장했다.

'병제'에서는 우리나라의 역대 군사 제도 및 이에 대한 논의, 군사 경비, 중국·일본의 군사 제도 등을 논하였다. 선생은 우리 병제 문제의 원인을 남쪽은 왜국, 북쪽은 청나라에서 찾았다.

제3책은 '관방'·'관수만록' 상·하다. 조선 후기 군사 정책 및 관방 계획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방안을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 군정사를 연구하는 데 지금도 도움이 될 만큼 세세히 기록하였다.

'관방'(關防)은 전국 각지에 있는 관방의 상황을 논하였다. '관수만록'(觀水漫錄) 상·하는 정조가 1793년 정월, 수원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고 유수영(留守營)을 장용외영(壯勇外營)으로 정하였는데, 이에 선생이 수원의 번영과 여러 방책을 기술한 부분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