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똘뭉친 인천항, 외자선 입항 약속 받다

인천항 미군원조 물자 하역항 활기
1950년대 초까지 호경기 였으나
하역업 난립·통합 … 1만명 실직도
체불만 1500만원 아우성 상처도

부산항 당시 온전한 도크시설 가능
인천항 항만시설 불비·비능률 작업
ECA 미군원조 부산항 입항 소식뿐

관계자 인천항에 정기적 입항 노력
월 최소 2만5000t 입항 확답 받아
그러나 한 주 뒤 6·25전쟁 발발 비극
▲ 외항에서 작은 배에 실어온 물자를 다시 육지에 양륙하는 작업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 기간 동안 도크를 정비하지 못한 까닭에 화물선들은 대부분 외항에 정박해 이런 식으로 하역을 했다. 이것이 부산항보다 작업능률을 저하시켰던 것이다./사진출처=인천사진대관
▲ 외항에서 작은 배에 실어온 물자를 다시 육지에 양륙하는 작업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 기간 동안 도크를 정비하지 못한 까닭에 화물선들은 대부분 외항에 정박해 이런 식으로 하역을 했다. 이것이 부산항보다 작업능률을 저하시켰던 것이다./사진출처=인천사진대관

ECA 창설에 따라 미군 원조물자 하역항으로 활기를 띄던 인천항은 1950년 4월경부터 물자의 입하가 주춤한다. 그리고 6·25 직전인 5월, 6월 초순경에는 주춤 정도가 아니라 항만업계 전체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급작한 침체에 빠진다. 그 실정을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1949년 4월13일자 연합신문 기사. 미국 ECA가 물자 양륙이 쾌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데 대해 감사문을 외자총국에 보내왔다고 보도하면서, 부산항에서의 하역작업이 시간 절약 등 능률적으로 체선비(滯船費)를 줄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 1949년 4월13일자 연합신문 기사. 미국 ECA가 물자 양륙이 쾌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데 대해 감사문을 외자총국에 보내왔다고 보도하면서, 부산항에서의 하역작업이 시간 절약 등 능률적으로 체선비(滯船費)를 줄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때 하역 만능을 부르짖으며 난립한 하역업체들은 통합이라는 진통을 겪고 가까스로 정비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외자 입하량의 감소로 항만 경기가 침체되어 1만여 명의 부두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 무렵 대한운수 등 5개 사의 체불 노임만 해도 1500만원에 달해 근로자 대표와 가족들이 인천시에 몰려와 밀린 노임을 받게 해 달라고 아우성친 사건은 인천 하역사에 뼈아픈 상처였다.』

▲ 1949년도 당시 인천항에는 상당한 물자가 입하되었다. 한 해 입하 총량이 약 28만3000t으로 해상, 육상을 합해 살포된 노임은 약 9억5000여만원이었다고 보도한 1950년 1월1일자 대중일보 기사.
▲ 1949년도 당시 인천항에는 상당한 물자가 입하되었다. 한 해 입하 총량이 약 28만3000t으로 해상, 육상을 합해 살포된 노임은 약 9억5000여만원이었다고 보도한 1950년 1월1일자 대중일보 기사.

무슨 까닭에 당시 국내 제1의 관문 역할을 하던 인천항에 갑작스럽게 입하 물자가 급감했던 것일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시 1949년도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월19일자 조선중앙일보 보도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1949년 2월16일, 인천항에 ECA 첫 물자인 소맥이 입하될 때, ECA 관계자 환영을 위해 인천항에 내려온 이범석 국무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하륙작업은 부산에다 중점을 두고 인천은 그 다음 요지이다. 그리고 여수, 목포, 포항 등 항구도 하륙작업이 가능한지 방금 조사 중에 있다.”고 발언하는 것이다.

이보다 두 달 정도 뒤의 보도이지만, 4월13일자 연합신문 기사와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연합신문은 미국 ECA가 물자 양륙이 쾌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데 대해 감사문을 외자총국에 보내왔다고 보도하면서, 부산항에서의 하역작업이 체선비(滯船費)를 줄이고 있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연합신문 기사의 뒷부분이다.

▲ 1950년대 들면서 인천항의 시설이 불비하다는 이유로 ECA 원조물자가 대부분이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바람에 인천항은 비상이 걸린다. 이에 따라 인천에서는 항만위원회, 항만발전대책위원회가 연이어 열려 자구책 강구에 나선다. 1950년 6월9일자 대중일보 기사이다.
▲ 1950년대 들면서 인천항의 시설이 불비하다는 이유로 ECA 원조물자가 대부분이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바람에 인천항은 비상이 걸린다. 이에 따라 인천에서는 항만위원회, 항만발전대책위원회가 연이어 열려 자구책 강구에 나선다. 1950년 6월9일자 대중일보 기사이다.

『현재 부산에서 짐을 풀고 있는 수선(輸船)은 일평균 2000불 내지 3000불의 비용이 드는데 미 당국이 양륙 책임을 지고 있을 때에는 그 양륙 기간이 1개월 이상이나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한국정부가 책임을 인계한 후로는 그 기간이 1주일이나 단축되어 이로 말미암아 절약된 금액은 원조물자를 더 많이 수입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부산항에서의 양륙작업이 이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앞서 이 총리가 그렇게 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에 비해 인천항은 선거(船渠)의 퇴락과 준설(浚渫) 미비 등으로 온전한 도크 사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멀리 외항에 정박한 외자(外資) 선박에서 다시 소형 선박으로 옮겨 실어 나르는 실정이었으니, 체선 문제 등으로 부산항의 능률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인천항의 불비(不備)에 대해 그간 도하 여러 신문이 수리, 복구를 지적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작 1949년 11월19일에 가서야 대중일보가 비로소 대규모 인천항 정비 계획이 수립되어 익년 예산에 반영시킬 것이라는 보도를 내는 실정이었다.

▲ 1950년 6월15일 인천항자유노조가 미국 ECA 등 관계자들과 담판에 나서 매월 5만t 이상의 물자를 인천항에 배정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 절반인 월 2만5000톤 이상 입하할 것을 약속받는다. 이에 대해 1950년 6월17일 대중일보는 “외자선이 온다!”고 특필한다.
▲ 1950년 6월15일 인천항자유노조가 미국 ECA 등 관계자들과 담판에 나서 매월 5만t 이상의 물자를 인천항에 배정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 절반인 월 2만5000톤 이상 입하할 것을 약속받는다. 이에 대해 1950년 6월17일 대중일보는 “외자선이 온다!”고 특필한다.

이 같은 결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1950년 초반 무렵까지는 부산과 더불어 인천항에도 상당한 외자 물량이 입하되고 있었다. 1월23일자 동아일보는 “ECA 수송선이 꼬리를 물고 입항하여 인천항 부두는 활기를 띄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부두 노동자들은 물론 일반을 명랑하게 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물론 외자총국과 하역업자 간의 행정상의 문제였지만, 일시 '노동자들 임금이 2개월 이상 체불되어 천정부지의 물가고에 생활난을 겪고 있다'는 보도도 뒤따르기는 했으나, 1950년 초의 인천항 하역업계는 전반적으로 호경기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 서두에서 말한 비명소리가 인천항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이었다. 1949년 1년간, 인천항에 입하된 ECA 물자 총량은 약 28만3000t으로 “항도에 해상, 육상을 합하여 살포된 노임은 약 9억5000여만원”이었다는 대중일보의 보도가 무색하게, 1950년 1월의 하역 물량 1만9556t에서 차츰 줄어들어 4월 1만3686t, 그리고 5월에 들어서는 월평균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 수준인 4785t에 그친 것이다. 1949년 같은 기간의 물량을 비교해도 약 3만6000t이나 감소한 것이었다.

이 무렵 언론 보도를 보아도 ECA 물자는 이 국무총리 언급대로 대부분 '중점 항구인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내용뿐이었다. 이 모든 원인이 인천항에 누적된 불리(不利)와 비능률의 결과였다.

▲ 1950년 6월21일부터 27일 사이에 연달아 7척의 외자선이 인천항에 입항하다는 보도와 함께 인천항의 작업 능률을 시험하는 케이스가 될 것이라며 작업시간의 지체가 없도록 철저를 기하자는 대중일보의 독려 기사이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50년 6월21일부터 27일 사이에 연달아 7척의 외자선이 인천항에 입항하다는 보도와 함께 인천항의 작업 능률을 시험하는 케이스가 될 것이라며 작업시간의 지체가 없도록 철저를 기하자는 대중일보의 독려 기사이다. /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6월초, 대중일보에 실린 “인천은 항만시설이 불비하여 외선이 내항에 입항할 수 없으므로, ECA에서 회항을 시키지 않으므로, 방금 송(宋) 소장이 ECA 주한(駐韓) 책임자와 교섭 중에 있다”는 외자총국인천사무소 부소장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에 하역회사 조선운수 관계자는 근본 해결책으로 “ECA 당국과 정부가 계약 당시에 인천항을 지정 항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입항”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천항은 비상상태였다. 부랴부랴 인천항만위원회는 자구책 강구를 위해 6월7일 시장실에서 회의를 갖고, '관민일치 선박 도입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각계각층을 망라해서 절충위원을 위촉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로 결의'한다.

12일에는 인천항발전대책위원회도 개최된다. 인천시장을 필두로 '상공회의소 회두, 외자총국인천소장, 항만자유노조위원장, 조선운수지점장, 이용설, 곽상훈, 조봉암, 한은인천지점장, 수상경찰서장, 합동통신지사장' 등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하고, 선박 유치 구체안 마련을 위해 16일에 첫 상임위원회를 열 것을 결의한다.

인천항만자유노조 역시 사활을 건 외자선 유치 활동을 편다. 그 결과 6월15일 오전 10시 서울 반도호텔에서 미국 노동고문 주재 하에 외자총국 대표, ECA 관계자, 인천자유노조 대표 유경원(劉京元) 등이 회동하여 매월 5만 t 이상 인천항 입하에 대해 논의를 갖기에 이른다.

절반이었지만 자유노조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인천항 두절(杜絶)' '만여(萬餘) 노무자 비명' 등의 비관적 기사 제목을 달던 대중일보는 다시 “외자선이 온다!”며 기쁨의 탄성을 발하는 것이다. 15일의 회의에서 자유노조는 ECA 측으로부터 최소한 월 2만5000t 이상을 정기적으로 인천항에 입하시킨다는 확답을 받아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선박 7척, 3만8949t의 물자가 21일부터 27일 사이에 연이어 입항한다는 통보가 온다. 이에 대해 대중일보는 이번 입하는 인천항의 '작업능률'을 시험하는 케이스가 될 것이라며, 모든 항만 관계자와 시민이 일치 협조하여 ECA가 당부한 '작업시간 지체'가 없도록 철저를 기해 '인천항의 능률'을 과시하자고 독려한다.

그러나 이렇게 곡절을 겪으며 얻은 기쁨과 안도, 한 줄기 빛살 같았던 희망을 채 펼치기도 전에 인천항은 또 다시 암흑 속에 빠져 든다. 이로부터 불과 한 주일 남짓 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비극, 6·25전쟁이 발발하는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