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면직품·철·설탕 수출
한국을 시장화 하는데 앞장
청국서 직물류 주로 수입
양잿물·설탕·콩기름 등 위주
타운센드상회·홈링거양회 유명
세창양행 금계랍·세창바늘판매
담배·여성용 궐련초 판매도
조선 견문록에 곰방대 글 다수
광목·옥양목·비누 사치품
조선서 많은 편익 얻기도
개항이 제물포에 가져온 변화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쓰이는 생활용품의 도래(渡來)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항을 따라 제물포항에 들어온 서양 상인이나 청국, 일본 상인들이 가져온 것도 생활 소비용품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 기술이 그렇듯이 서민 대중의 삶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천광역시사』 역시 오직 개항에 관련한 정치, 제도, 사회 일반에 대한 기록뿐이다. 문호 개방 이후 수입된 서구 문물을 통해 우리 서민들의 삶이나 그로 인한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천 같은 내용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인천 역사를 다시 기록하려는 의도가 아니매 굳이 당시 개화 상품과 우리 서민 삶에 대해 추측이라도 해 보려한다.
그나마 비슷한 기록을 남긴 분이 역시 신태범 박사로 당시 서민들이 찾던 개화 수입 생활용품들을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자세히 남겼다. 그 중 조선 사람들을 겨냥해 들여온 일본 상품에 대한 구절을 소개한다.
때마침 산업의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면직물,철제품,설탕 등 공업제품을 비롯 일용잡화를 다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국식 다자인을 한 사기그릇,옷감,성냥,등잔,수건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이러한 일본 상품을 가지고 한국을 그들의 시장화 하는 데 앞장섰다.
청국으로부터의 수입 잡화는 주로 직물류였는데, 당시 우리의 의식주 생활 전반이 낙후한 중에도 당장 의복의 필요가 가장 시급했던 까닭이었다. 품목은 대체로 광목, 옥양목 등이었고, 거기에 광목 등의 세탁에 필요한 양잿물과 주방용품으로 설탕, 콩기름 등이 주를 이루었다.
양잿물은 광복과 6.25를 지난 후에도 여전히 쓰였는데 우리의 세제(洗劑) 공업발전이 더디었던 이유였다. 독극물, 가성소다인 양잿물은 광목 같은 거친 직물을 부드럽게 하고 색깔도 하얗게 세탁하기 위해 빨래에 넣어 삶는데, 1960년대 무렵까지 신포동 일대 화교 잡화상에서 드럼통 같은 데에 보관하며 판매하던 것을 기억한다.
세창양행이나 타운센드상회, 홈 링거양행으로 대변되는 서양 상인들 역시 키니네의 즉효(卽效) 약 금계랍 같은 약품이나 물감, 바늘, 면도칼, 또는 밀가루, 시멘트, 유리, 그리고 등유용(燈油用) 석유, 랑프(램프) 등 서민 생활에 요긴한 상품들을 들여와 팔았다. 홈 링거양행은 식용소다와 세탁용 가성소다를 판매했던 곳으로도 유명했다.
세창양행의 바늘의 성가(聲價)는 대단해서 광복과 6.25를 거쳐 1950년대에 이르도록 바늘 끝이 잘 무뎌지지 않는 '세창바늘'로 부녀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독일 철강산업의 우수성을 짐작케 하는 한 단면이다. 금계랍 역시 가정상비약으로 두고두고 유용하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생활용품이라기보다 기호품인 서양 담배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에서 그리스 사람이 시작했다가 실패한 연초공장을 미국인이 인계하여 제물포연초회사(濟物浦煙草會社, Chemulpo Tobacco Co.)를 개설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동일한 회사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 비슷한 명칭의 담배회사가 광고를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회사의 정식 우리말 명칭은 제물포지권연급연초회사(濟物浦紙卷煙及煙草會社)이고, 영문명은 'Chemulpo Cigarette & Tobacco Co.'였던 이 회사는 1905년 세 종류의 담배 광고를 수차에 걸쳐 독립신문 등에 싣는다. 조선연초주식회사(朝鮮煙草株式會社)라는 일본회사는 1914년 11월 8일자 매일신보에 한복차림의 여성 모델 그림을 그려놓고, 여성용 담배라며 '궐련초'를 선전하기도 한다.
개항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견문록에 곰방대에 대한 글이 상당히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조선인 흡연 인구가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개항 후 외국상인들이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제일 먼저 조선을 담배 시장으로 꼽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담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태범 박사의 또 다른 일화가 떠오른다. 당시 서양 엽연초와 함께 이탈리아 고르돈(Gordon) 회사의 담배 파이프가 들어오면서 그 발음이 와전되어 '꼴통담뱃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담뱃대는 마도로스파이프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기도 했는데, 그 이름들이 그대로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입성은 청관(淸館)에서 광목과 옥양목을 수입하게 되어 많은 편익을 얻게 되었다. 타월(Towel)과 양말, 그리고 권연과 사분(Savon)이라 부르던 비누도 함께 들어와 있었으나 아직은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먼 사치품이었다.
이 역시 앞의 신 박사의 저서 구절이다. 광목과 옥양목, 권연 외에 수건이나 양말, 비누 같은 생활용품이 수입되고 있음을 밝히면서도 당시 인천의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이 같은 수입, 박래품(舶來品)들이 아직 일상에 상용(常用)할 수 없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 서민들이 '아직은 사치품'이었던, 신기한 개화 물품들을 쉽게 접하거나 사용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당시 중산, 혹은 상류층 일부는 이들을 사용함으로써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한걸음 앞서 생활의 변화를 꾀했을 것이고, 더불어 그 같은 생활의 변화는 차츰 그들 내면 의식의 변화에까지 가 닿았을 것이다.
결국 그 같은 의식 변화의 한 가닥은 곧, 그들 2세들에 대한 교육열로 이어졌을 것이다. 서양이나 청.일로부터의 수입 문물들을 접하면서, 배워야 개화하며, 개화해야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성했으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각성은 경인기차통학이라는 극성스러운 통학제도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후일 그들 2세, 즉 경인기차통학생 다수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각 분야에서 이름을 빛내고 있음이 그 증명이라 할 것이다.
또 한 가닥은 여러 명 인천 발명가들의 탄생에 연결된다. 서양 문물의 유용함과 특이함에 자극받은 이들의 정신은 다시 수많은 서민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저들 외래품이 우리 산업경제를 무참히 잠식했으나, 인천항에서는 역설적으로 각성제, 자극제가 되기도 했었으니….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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