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좌통령 김구 선생, 역사 교과서에 반영을”

김창수 시작으로 48회 걸쳐 23명의 의병장 활약 연재
황현, 강화도에 7000 의병 운집 사실 <매천야록> 기록
연구 미진해 포상 받지 못한 분 많아 참으로 안타까워
▲ 광복 직후 강화도를 방문한 김구 선생 일행.
▲ 연기우 의병장 어록비(독립기념관).
▲ 연기우 의병장 어록비(독립기념관).
▲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13도창의군탑'(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13도창의군탑'(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인천일보가 2020년 연중기획으로 인천과 경기지역의 주요 의병장과 의병활동을 발굴, 재조명하는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을 연재했다.

지난 1월6일 백범 김구 선생과 강화지역 의병장들의 인연을 다룬 '의병좌통령 김창수(김구)와 인천·강화'를 시작으로 지난 20일 '남한산성 점령, 서울진공 꾀했던 김하락 의병장'까지 인천과 경기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의병장 이야기를 총 48회에 걸쳐 살펴봤다.

이번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집필한 이태룡 박사는 1986년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한 뒤 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의병문학인 '의병가사를 중심으로 한 의병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 의병연구의 대가로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태룡 박사는 지금까지 370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공개하여 포상 신청을 한 바 있다.

이태룡 박사는 이번 기획연재를 마치며 에필로그 형식으로 지난 1년을 되돌아봤다.

2020년 12월26일, 1년 동안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연재를 마치고, 성탄절을 시작으로 3일 연속 휴일이지만 연구소에서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하는 상황인데, 지인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쉬고 계시겠네요?”

“제5차 독립유공 대상자 포상신청을 새해 2월 중순에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도 연구소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년에도 포상신청을 해야 할 독립운동가가 많습니까?”

“엄청 많습니다만 하루가 24시간밖에 안 되니…”

“인천일보에 연재까지 하느라고 무척 바쁘셨겠습니다.”

“바빴지만 해야 할 일이고, 인천·경기, 경인지역의 의병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소개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1년 동안 연재를 해오면서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꽤 있지 않았나요?”

“처음 김구 선생에 대하여 연재를 했을 때, 김구 선생이 동학 접주 출신인 줄은 알았지만, 의병장 출신으로서 일본인을 처단한 사실을 몰랐다는 반응이고, 특히 일본 비밀기록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일부 독자는 의병에 대한 문의를 하거나 저의 연구소를 찾아와서 자신의 조부나 증조부의 공적을 찾아 포상신청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대동창의진 대장 이능권 피체. 일본 순사 미즈노(水野憲)가 이끈 일·한 순사대에 의해 당시 경기도 부평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인 상태로 끌려와서 고려산에 숨겨둔 총 15정, 탄환 566발을 압수당한 이능권 의병장의 모습이다.
▲ 대동창의진 대장 이능권 피체. 일본 순사 미즈노(水野憲)가 이끈 일·한 순사대에 의해 당시 경기도 부평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인 상태로 끌려와서 고려산에 숨겨둔 총 15정, 탄환 566발을 압수당한 이능권 의병장의 모습이다.
▲ 1894년 7월23일(음력 6월21일)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명을 이끌고 경북궁을 쳐들어온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원 표시). 그의 딸이 전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머니이니, 그는 아베의 외증조부이다.
▲ 1894년 7월23일(음력 6월21일)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명을 이끌고 경북궁을 쳐들어온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원 표시). 그의 딸이 전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머니이니, 그는 아베의 외증조부이다.

이번 기획연재는 그동안 국내외 고증자료를 바탕으로 월요일이 공휴일이었던 날을 제외하고 매주 월요일 48회에 걸쳐 인천·경기 지역 주요 의병장 23명의 공적을 정리하여 연재하였다.

23명의 의병장 가운데 첫 번째로 연재한 김창수(김구)는 1895년 9월(음력)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평안북도 강계·벽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청일전쟁 때 사병 1500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1000여명과 함께 전사한 서옥생(徐玉生) 장군의 아들 서경장(徐慶璋)을 만나게 되어 필담을 나눴는데, 서경장은 반일투쟁을 벌이고자 하는 김창수에게 '의병좌통령(義兵左統領)'이라는 첩지를 주었다. 강계의병을 이끈 김이언과 의병투쟁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자 귀향하던 중, 이듬해 3월8일 황해도 안악 치하포(治下浦) 어느 주막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김창수, 경기도 연합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서울진공을 하고자 했던 김하락,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25일까지 서울진공을 전개했던 13도창의대진의 총대장 이인영·대대장 연기우, 13도창의대진의 안무장·총도독 김수민, 헤이그특사 이준 일행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호종한 후 귀국하여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 소식이 대한매일신보를 보고 강화도에서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을 조직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이능권 등의 의병장은 인천·경기 지역 의병장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의병장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6. 7. 10.)에는 인천일본영사관 영사사무대리 하기하라(萩原守一)는 일본공사 하라(原敬)에게 보낸 문서에는 김창수의 신분을 '의병대장', '김 장군'이라고 한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국사(한국사)나 근현대사 교과서는 이것이 반영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매천 황현 선생은 <매천야록>에서 1907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강화에 모인 경기의병이 7000명이었다고 기록했으니, 강화도는 의병세상이었음이 분명한데, 이토록 많은 분들이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음에도 강화의병에 대한 연구가 미진해서 포상을 받은 분보다 포상을 받지 못한 분이 수백 배 더 많은 실정이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