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으로 3대가 망한다면, 이게 나라인가



<독립운동사>엔 서울진공작전 전개 직전
아버지 부음 듣고 경북 문경으로 낙향하고
허위 의진이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으나
일본군 신식무기에 밀려 물러났다고 기록
평민 의병장 배제로 대중 기반 약화 혹평도

그러나 일제 진술조서엔 동대문 밖 30리에
2000여 의병 이끌고 진출한 것으로 확인돼
교남 창의대장으로 신돌석 선임된 것 보면
의병 연합서 신분차별 평가는 엄청난 오류

친일파 등쌀에 못 이겨 일가친척들 간도행
후손 일부 귀국했으나 냉대로 하층민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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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13도창의군탑'.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13도창의군탑'.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공원)

 

▲ 이인영 의병장의 처분을 본국으로 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대한에 파견할 때까지 보류하라는 문서. (<통감부문서 9권>. 1909. 6. 16.)
▲ 이인영 의병장의 처분을 본국으로 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대한에 파견할 때까지 보류하라는 문서. (<통감부문서 9권>. 1909. 6. 16.)

 

◆ 동대문 밖 30리 진출한 의병장은 누구였나?

<독립운동사> 1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직전 이인영 의병장은 아버지 부음을 듣고 문경으로 내려가고, 허위 의병장이 친히 정병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의해 타격을 받고 물러나고 말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서울진공작전에 대한 우리나라 사료는 대한매일신보(1909), 송상도의 <기려수필>(1955), 김정명의 <조선독립운동>(1967) 등이 있고, 일제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문서로 남긴 기록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폭도에 관한 편책> 등에 남아 있다.

<독립운동사> 1권에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기려수필>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군사장(軍事長)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상사(鐵筒相似)하매 일적(一適)의 수(水)도 누할 격(隙)이 무한지라. 이에 전군에 전령하여 일제 진군을 촉하여 동대문 외로 진박(進迫)할 새, 대군은 장사(長蛇)의 세로 서진(徐進)케 하고 씨(氏)가 3백 명을 솔하고 선두에 입하여 문외 30리에 진하여, 전군의 내회(來會)를 사(侯)하여 일거에 경성(京城)을 공입하기로 계하니, 전군의 내집(來集)은 시기를 위(違)하고 일병이 졸박(卒迫)하는지라. 다시간(多時間)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이 부지하므로 잉(仍)히 퇴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21일)

이 기사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한 후 약 2년 뒤에 정리한 것이다. 비록 '군사장(軍事長)'이라 하였지만, 군사장(軍師長)을 맡은 허위 의병장이 동대문 밖 30리에 육박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기려수필> '이인영·이은찬 편'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군사(軍師)는 그 군려(軍旅)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있어서 이인영은 각도 의려(義旅)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외 30리에 이르렀다. 각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더불어 분전하였으나 적에게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권, 507~508쪽)

<기려수필>에서는 중남 이인영 총대장이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동대문 외 30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인데, <독립운동사> 1권에는 후자의 내용을 앞에 기술하고도 이를 무시하였다.

중남이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되어 신문을 받은 기록에서 자신이 2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되는 곳에 진출하였다고 했으니, <기려수필> 내용과 일치한다. 다만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한 의병의 수가 차이가 나고 있다.

 

“문 : 당시 경성 부근에 온 적이 없는가?

답 : 있습니다.

문 : 문 밖 20~30리 되는 곳에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답 : 한리(韓里) 30리 되는 곳에 갔습니다.

문 : 무슨 용건이 있어서 왔는가?

답 : 대(隊:의병부대-필자 주)를 데리고 갔습니다. 인원은 약 2,000명이었습니다.” ('이인영진술조서', <통감부문서> 8권, 1909년 6월 30일)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1993년 9월) '이인영 편'에서는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라고 하여 바로잡았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중략)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1907년 12월 25일(양력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중남 이인영 의병장 묘.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중남 이인영 의병장 묘.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이인영 가문의 족보와 가첩. (1992년 필자 촬영)
▲ 이인영 가문의 족보와 가첩. (1992년 필자 촬영)

 

◆ <독립운동사>의 오류

<독립운동사> 1권에서는 “전국연합 의병부대 재편성 과정에서 당시 일본군경의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신돌석과 평민 출신 홍범도·김수민 등과 같은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제외되었다. 이들 평민 출신의 의병장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후 의병부대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투쟁성과 기동전술이 미비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기술하였는데, 이것은 엄청난 오류였다.

'이인영진술조서'에는 중남이 황제의 조칙을 받고 거의했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묻는 장면에서 “이강년, 신돌석이 함께 있었음”이 나오고 있고, 특히 교남(영남) 창의대장으로 신돌석이 선임된 것에서 위의 내용과 맞지 않으며, 김수민의 피체 기록에서는 양반 출신으로 주사를 지냈다고 기록했고, 판결문에는 김수민 의진이 중남 의진과 합진하여 의병투쟁을 벌인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1907년-필자 주) 음력 12월 중에 이르러 부하 병사 약 100명을 거느리고 이인영의 부대와 합병한 이래 이인영, 이은찬 등과 함께 경기도 내 장단, 마전 등 각지를 횡행하여 일본 병사와 여러 차례 교전하며 융희 3년 음력 2월경까지 계속하여 내란을 일으킨 자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76~77쪽)

 

◆ 중남과 함께했던 의병・의병장과 그 후예의 삶

관동의진과 13도창의대진소 원수부의 중군장이었으며, 중남이 문경으로 향한 후 의진을 이끌었던 이은찬 의병장에 대하여 마쓰이(松井茂) 내부 경무국장이 통감과 일본군 사령관 등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그가 주민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그 면모가 드러나 있다.

“이은찬은 유생으로 천성이 영리하고 재기가 있다. 국가를 위한 지사적 사상을 갖고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민심을 수렴하였다.…군량미의 징발과 같은 것도 직접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강제로 빼앗는 것은 피하고, 각 면장 등에게 통고하여 일반인에게 징집시켰으며, 또 음식물 기타 구입 물품의 대금도 지불을 게을리하지 않고, 혹은 유사의 증표로써 대신하고 후일 그 대금을 지불했으며, 되도록 인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부하 의병들은 물론 지방민들도 그 덕에 감사하고 이(李)를 '대장(大將)' 또는 '각하(閣下)'라고 일컬었다. 순진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기쁘게 영접하고, 그의 행동을 비밀로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보초가 되어 그 주위를 경계하기도 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62~264쪽)

그에 대한 일제의 기록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만 107차례나 언급되고 있지만, 실제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는 40여 차례였다. 부왜인의 계략에 피체되어 1909년 5월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자 공소하지 않은 채 그 해 6월16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개성·장단에서 약하다가 자신의 의진을 이끌고 중남이 이끈 원수부에 합진했던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0월14일 경성지방재판소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피체 직후 공소하였으나 11월2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그 해 12월11일 조선통감부 데라우치 통감의 사형집행 명령에 따라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

경북 문경 출신 정흥대(鄭興大)·남만귀(南萬貴)는 각각 교수형과 징역 3년, 강원도 영월 출신 홍의선(洪宜善)은 징역 5년, 경기 고양 출신 김창식(金昌植)과 평남 영변 출신 한원태(韓元泰)는 유형 15년, 경기도 양주 출신 이기상(李起商)은 유형 7년, 부교로 퇴역한 경성 출신 김규식(金奎植)은 유형 15년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중남의 아우 이은영(李殷榮) 의병장은 독자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13도창의대진이 형성될 때 형을 따라 종군하였고, 경술국치 직후에는 비밀결사 민단조합(民團組合)을 조직하고 충북도지회장이 되어 격문을 작성, 배포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1921년 조국광복을 위하여 북간도로 갔다가 마적단의 습격으로 숨졌다.

이은영 의병장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일대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다가 약 20년 전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국적을 회복시켜 주어 손자 이종현(李鍾現) 가족이 하얼빈으로부터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해 보니, 정부 지원이나 생계대책은커녕 마치 '돈 벌러 대한민국에 온 조선족'인 양 냉대와 멸시뿐이어서 막노동으로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10년 만에 병사하였고, 증손녀 이명옥(李明玉·62) 씨는 고된 삶 속에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에 살 때는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이처럼 순국선열의 후손은 한숨과 눈물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필자는 2014년 2월26일 국회도서관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의 눈물,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공청회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한 의병 후손의 삶과 포상을 받은 분의 손자가 이미 고인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니, 보훈 혜택이 조선시대처럼 증손자까지 미쳐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아직까지 법제화 과정에 있다니 한숨이 나온다.

필자가 박사과정 중에 있던 1992년 여름, 중남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생가를 찾아 중남의 6촌 아우이자 족보상으로는 필자에게 할아버지뻘인 이진영(李進榮·당시 61세)씨를 뵈었다. 그곳은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중남의 가까운 일가만 아홉 가구가 살았지만 중남이 순국한 직후 일제와 부왜인들의 등쌀에 못 이겨 간도로 떠났다가 광복이 되던 해 두 가구만 돌아와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재종형(이인영)은 아들 셋을 두었지요. 맏재종질은 규용(圭容)이고, 둘째는 규명(圭明), 막내는 규철(圭哲)이지요.”

“족보에는 규철이 나와 있지 않은데요?”

“족보에는 없어도 여기(가첩)에는 규철이 나와 있고, 경술국치 후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간도에서 광복 활동을 벌이다가 순국했기에 족보에는 빠졌습니다.”

이진영씨가 고이 간직했다가 편 가첩은 한 폭이 편지봉투 크기 정도의 6폭인데, 두꺼운 종이에 붓으로 깨알 같은 한자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장으로, 아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다가 순국했으니, 충절가의 표본이 아니리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