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기 전투기술 중심 한·중·일 무예 아울러

<권4>

권법(拳法)·곤봉(棍棒)·편곤(鞭棍)·마상편곤(馬上鞭棍)·격구(擊毬)·마상재(馬上才) 등 여섯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전 무예서에는 보이지 않는 마상기(馬上技)를 실었다는 점에서 전투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전투서라 할 수 있다. 기마민족으로서의 의지를 보이려는 조선식 사고를 드러내는 책이다. 권법과 마상재만 살핀다.

<무예도보통지>는 이렇게 모두 24가지 항목으로 구분된다. 특이하게도 ‘안’(案)을 붙여 일상 도구의 개선과 활용 방안을 적어놓은 데서 실학적 사고, 즉 이용후생 사상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기창’항에는 “호미나 고무래도 병기가 된다(鉏耰之爲兵器也)”고 하였다.

권법보
▲ 권법보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을 그린 ‘권법보’이다. 설명은 이렇다. “권법보, [원]두 사람이 각기 좌우 손을 허리 옆에 끼고 나란히 선다. 처음으로 탐마세(探馬勢)를 취하여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쳐 벗긴다. 그러고는 즉시 요란주세(拗鸞肘勢)를 취하여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쳐 벗긴다.”

(‘[원]’은 원래 있었던 서적에서 가져왔다는 의미이다. ‘권법보’의 ‘보’(譜)는 동작 설명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이 무예를 연마하는 무사치고는 너무 선하다는 점이다. 상대를 눕히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우리 조선인의 선한 모습을 저 격정적인 무예 그림에서도 찾는다.
 

▲ 마상재.
▲ 마상재

<무예도보통지>에서 ‘마상재’를 그린 ‘마상재보’이다. 설명은 이렇다.

“마상재보, [증] 처음에 말을 탈 때 손에 삼혈총(三穴銃, 이는 우리 고유의 휴대용 화기로 3개의 총신으로 연결되었다 하여 ‘삼혈포’라고도 한다)을 갖고 말 위에 탄다.” (‘[증]’은 새롭게 더하였다는 뜻이다.)

무사의 표정과는 달리 말의 기세가 호기롭다.

▲관복도설

<관복도설>

전투에 필요한 옷 그림과 설명이다.

<무예도보통지> ‘마상재관복도설(馬上才冠服圖說)’이다. 우측 상단이 발립(髮笠, 꿩 털을 꽂은 모자), 하단이 홍첩리(紅貼裏,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 연결시킨 붉은 옷으로 홍첩리 뒷배는 넓은 띠로 묶는다)이고 좌측 상단이 전립(戰笠), 하단이 호의(號衣,소매가 없거나 짧은 세 자락의 웃옷으로, 방위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소속을 나타냈다)이다. 설명은 이렇다.

“[증]무릇 말 위에서 재주를 겨루는 자는 전립(戰笠, 벙거지)이나 회의(盔衣, 투구)를 쓰고 붉고 누런색의 호의(號衣)를 입고 붉고 누런색 바지를 입는다. 혁옹혜(革翁鞵)는 입지 않는다(혜[鞵]와 혜[鞋]는 같은 가죽신이다).

 

<고이표>

각 부대에 따라 다른 기법을 비교한 표다. 훈련도감의 당파(鎲鈀)·쌍수도·교전과 금위영(禁衛營) 예도·제독검·본국검·쌍검, 용호영(龍虎營) 왜검·월도, 어영청(御營廳) 쌍검 등 자세들이 전수하는 곳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고이표를 만든 것이다.

공자도 군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활쏘기를 꼽았다. 당시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하는 데 비해 이 책은 24기 전투 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 훈련서로 중국, 조선, 나아가 일본 무예까지 아울렀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이익의 인식과 이덕무의 일본 종합 이해의 기록물인 <청령국지>, 한치윤의 <해동역사>와 연결된다. 그만큼 일본과의 관계를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본문 외에 당시 역사·사회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모아져 있어 그 진가를 더한다. 무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각기(各技)마다 중국식·아국식(我國式)을 뚜렷이 하고, 도식·설·보·도·총보·총도로 나누어 일일이 알기 쉽게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무예 장면은 선생의 실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의 또 다른 호 인재(靭齋) 풀이로 이 글을 마친다. ‘인(靭)’을 파자하면 가죽혁(革)과 칼날 인(刃)이다. 가죽은 부드럽고 질기며 칼날은 강하고 날카롭다. 선생은 불같은 자신의 성격을 유연하게 만들고자 이 호를 썼을 것이다. 18세기 조선을 살아내려는 선생의 자호(自號)이기에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짠하다. 기남자(奇男子)라 불렸던 야뇌 백동수, 선생은 정조 사후 미관말직으로 있다가 탐관오리로 귀양을 가는 등 고난을 겪다가 1816년 10월 3일, 향년 74세로 이승을 하직하였다.

(다음 회부터는 수운 최제우를 연재한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