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근대 스포츠의 하나로 각광 받았던 '베이스 볼'(야구)이 인천의 영어야학교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매년 전국의 주요 도시마다 수많은 마니아들이 참여해 즐기는 마라톤 역시 인천에서부터 그 전통의 불씨가 지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인천에서 마라톤이?" 하고 의아스러워 하시겠지만, 이유가 있었다. 개화기 신문물의 하나로 근대 스포츠가 도입된 선진 도시가 인천이자, 정규 코스인 42.195㎞를 달릴 수 있는 신식 도로 신작로가 번듯하게 서울 심장부까지 깔려 있어 경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마라톤대회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경성일주대회'였다.
하지만 1927년 12월4일 제강상회(諸岡商會) 주최 인천-경성 간 역전(驛傳) 경주대회가 개최되면서 인천은 줄곧 마라톤 대회 출발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1927년 참가 선수들은 인천 조선매일신문 본사 앞에서 출발했다. 선수들은 1구간 인천-주안, 2구간 주안-소사, 3구간 소사-오류동 등 전체 5구간으로 25리3분이 되는 코스를 뛰었는데 양정고(養正高) 팀이 경성부청 앞 결승점에서 우승 테이프를 끊었다.

본격적인 마라톤대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 4월3일 조선체육협회에 의해서였다. 대회 명칭은 '경성·인천간 왕복60리 역전마라손대회'. 경성우편국 앞을 출발해 인천세관 앞을 되돌아가는 코스였다. 이후 대회가 매년 열려 전국적인 마라톤 붐을 일게 했다,

인천에서 첫 마라톤대회가 열린 것은 1935년 4월21일이었다. 오전 10시12분 40여명의 선수들이 조선매일신문사 앞을 출발, 시내를 일주해 결승점 월미도로 향했는데, 가장 나이가 어린 동아일보 인천지국 소속의 이안순(李安淳) 선수가 우승해 화제를 모았다.

마라톤 붐이 크게 일자 이색적인 '내한(耐寒) 마라손'도 등장했다. 1936년 1월25일 인천환옥미두취인소(丸玉米豆取引所)에 근무하는 김용균(金鎔均·당시 24세)이 혹한을 무릅쓰고 인천을 출발, 전남 여수까지 주파했는가 하면, 월미도 벚꽃놀이가 한창인 5월10일에는 40여명의 선수가 출장한 '인천 관앵(벚꽃 구경) 마라손 대회'도 열렸다.

1930년대 마라톤의 하이라이트는 손기정 선수가 당당히 장식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하계 올림픽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은 전 국민을 울렸고, 인천 출신의 동아일보 기자이자 인천 지역 스포츠를 이끌었던 이길용 선생이 주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은 내내 인천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높였다.

1940년대의 마라톤계를 휩쓸었던 인천 홍중상공회사(弘中商工會社) 소속 현정효(玄正孝) 선수, 우리나라 마라톤 경주의 대명사였던 경인간왕복역전경주대회, 그 전통을 이어간 1959년도의 9·28수복 기념 국제마라톤 대회 등 마라톤 대회는 해마다 개최됐다.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에서 우승해 그 정점을 찍었던 날도 기억된다.

인천일보가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공인을 받아 국내 최초의 하프코스 마라톤대회를 개최한 것은 2001년이었다. 매년 마라톤 마니아들아 소중한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 동참해 일대 장관을 이루는 행사였는데, 이번에는 '코로라 19' 사태로 오는 6월로 대회를 연기하게 됐다는 본지의 사고(社告)가 있었다. 시민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선택이었다.

하루빨리 바이러스 사태에서 벗어나 전국 각처에서 인천을 찾았던 마니아들과 각급 직장인, 동아리 회원, 해외 선수들 등 3만여 참가자들의 축제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동북아의 중심도시' 인천에서 '건강 대한민국'을 재확인하는 장대한 레이스가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이해와 많은 관심을 지면을 통해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