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요즘 전전긍긍이다. '버블 악몽'을 씻어내고, 1964년에 버금가는 국가 전환의 대 전기를 마련하자며 올림픽 개최에 열을 올리다가 느닷없이 코로나19에 일격을 맞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코하마의 크루즈 선만 봉쇄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미온적 대처로 의료 선진국을 자처하던 자부심에 구멍이 뚫리는 심리적 상처도 입었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올림픽을 연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기 검열을 하며 늘 국가 캠페인에 동참해 온 언론도 붐 조성을 위해 성화 릴레이 코스와 주자 등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출발지를 원전 사고의 현장이었던 후쿠시마로 정해서 재난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로 나간다는 개최 의의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성화는 3월12일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채화돼 8일간 그리스 곳곳을 돈 후 20일 항공자위대에 의해 마쓰시마(松島) 기지로 옮겨진다. 그 후 25일까지 '부흥의 불'이란 성화 전시회를 미야기, 이와테 현에서 가진 후 26일 노구치 미즈키(野口瑞木, 아테네대회 여자 마라톤 우승) 선수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후쿠시마 현 나라하초(楢葉町)를 출발하는 성화는 3일간 현 일대를 돌아 29일 토치기 현, 31일 군마 현, 4월 2일 나가노 현, 4일 기후 현, 6일 아이치 현 순으로 전국을 순회한 뒤 7월24일 도쿄 신주쿠 구 도청 광장에 도착, 이튿날 행운의 최종 주자가 최초의 수소 가스 성화대를 점화하게 된다.

이 과정을 여배우, 우주비행사, 가수,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자, 만담가, 승마 기수, 프로야구 선수, 방송인, 탈렌트, 소설가, 장기 선수, 디자이너, 올림픽 메달 수상자, 프로 골퍼, 일본인 최초의 NBA 선수 등이 시민들과 함께할 계획이다.

일본이 성화 릴레이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38년이었다. 일본육상경기연맹이 베를린올림픽을 모방해 '국민정신작흥체육대회(國民精神作興體育大會)'를 열 때였다. 전승을 기원하며 520킬로미터에 달하는 신궁과 신사 사이를 1만5000여명이 달렸는데 이때 주자들은 군국 일본을 상징하듯 소위 '성모(聖矛)'라는 주술적 창을 치켜들고 뛰었다.

우리나라에 성화 릴레이가 등장한 것은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대회 때였다. 체육인 이상백(李相伯) 선생의 제안으로 강화 참성단에서 채화해 개최지까지 봉송해 '민족의 제전(祭典)'을 밝히기 시작했다. 서울·평창올림픽과 부산·인천아시안게임 때도 계속되었으나 그 원조가 히틀러의 나치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치스의 발명'(2001년 彩圖社 간)을 쓴 타게다 토모히로(武田知弘)는 고속도로 아우토반, 미사일 V2, 제트 전투기, 국민라디오 301, 알미늄 합금 비행선, 지멘스의 전자현미경, 국민차 폭스바겐, 의무교육제도, 노동자의 장기휴가, 자연농법, 재형저축 외에 '성화 릴레이'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나치스가 고안했다고 전한다.

IOC가 성화 릴레이를 올림픽 헌장에 넣은 것은 1951년이었다. 유태인의 도살자, 게슈타포의 집행자들이 만들어낸 이벤트를 런던 올림픽도 속행했었다. 그것을 일본이 먼저 받아들였고, 우리도 여러 나라처럼 형식적인 면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금년 도쿄올림픽 때도 일본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그렇다고 역대 올림픽 주최국이나 각국 릴레이 주자들, 또 그에 환호해 왔던 지구촌 시민들을 일거에 친 나치파(親 Nazi派)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비록 '성화 릴레이'가 나치즘의 광기 속에서 나온 체육 이벤트의 하나였지만, 거기에 인류의 보편적 상식이 용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 그간 지속됐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