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경인철도 개통(1899년 9월18일) 120주년을 맞아 관련 행사가 줄을 잇는다. 인천학연구원은 지난 18일 '철도와 도시문화, 120년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기서는 교수들이 인천 개항(1883년) 이후 경인철도 개통을 지나 펼쳐진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8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 '다시 철도, 인천이다'라는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박물관 측은 전시를 통해 경인선과 인천의 관계를 환기시키고, 노량진역에 잘못 세워진 철도시발지 기념비의 제자리 찾기 프로그램도 선보일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철도의 날'을 경인선 개통일에서 철도국 창설일(6월28일)로 변경해 논란을 빚는다. 일제잔재 청산이란 역사의식엔 공감하면서도 교통과 물류 분야에서 획기적 변화를 이끌고, 우리의 근대적 의지도 담긴 만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인천에서 경인철도 기공식(1897년 3월22일)을 하고, 경인선이 시발(始發)한 만큼 인천이 품은 역사적 의미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

각설(却說)하고, 일제강점기 경인선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온다. 경인철도 전 구간을 완공한 1915년부터 인천~경성(서울) 간 기차통학이 본격화했는데, 통학생이 늘자 '인천 한용단(漢勇團)'이란 친목회가 결성됐다. 인천이 기른 거물 정치인 곽상훈(1896~1980)이 조직한 한용단은 이후 야구단을 꾸렸다. 야구팀으로선 인천 최초였다. 한용단 홈구장은 현 제물포고교 자리인 웃터골. 인천미두취인소 주축인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인 팀과 맞붙었다고 한다.

인천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고일은 1955년 펴낸 '인천석금(仁川昔今'에서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나섰다. 할머니도 스트라익하고 할아버지도 홈런 소리를 외쳤다."며 당시 한용단을 응원하는 한·일 야구전을 회상했다. 한용단은 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인 자주적 단결체였던 셈이다. 구장에서 일본인들과 충돌한 사건을 빌미로 1924년 해체됐지만, 한용단은 오늘을 사는 인천인들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경인철도는 일제의 한반도 수탈과 군사적 목적 등으로 개통됐어도, 이처럼 인천의 '문화역량'을 북돋기도 했다. 그 첨병 노릇을 한 이들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이었다. 일제의 침략 교두보로 건설된 경인선을 되레 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구심체로 탈바꿈시키지 않았는가. 경인선 개통 120주년을 돌아보면서 문득 든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