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실크로드를 가다 3] 9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은 韓中日 영웅 '신라인 장보고'
▲ 중국 적산 법화원의 장보고상.

 

 

 

▲ 장보고 무역선 관교선

 

극심한 궁핍에 당으로 건너가 장교로 근무

완도 청해진 설치 … 노예무역 근절·해상교역

중개무역 통해 군사·부 얻어 '해상왕국' 건설

中 적산에 법화원 세워 재당신라인 결속다져

군소 해상세력·왕실 보낸 자객에 암살 당해

당 詩人 두목·하버드大 교수 등 '영웅' 추앙


산둥성 적산의 법화원은 장보고가 황해와 동중국해를 주름잡으며 해상무역의 왕자로 군림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 곳이다. 한중일 삼국이 모두 인정하는 해상 무역왕 신라인 장보고. 탐사 팀은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산둥성 적산의 법화원을 향하였다.

두 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법화원은 태풍이 지나간 뒤여서 무더운 습기를 잔뜩 머금은 비가 내린다. 그래서인지 법화원을 둘러보는 일행은 탐사 팀뿐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빗속에 우뚝 선 장보고 장군상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반긴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한다.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천한 출신이다. 오늘날 장보고로 익히 알려진 것은 당나라 때의 시인 두목에 의해서다.

9세기는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왕위쟁탈전이 치열한 시기였다. 또한, 재해와 기근으로 농민층은 피폐했고 도적떼는 횡행했다. 극심한 궁핍은 더 이상 백성들을 고향에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뿔뿔이 고향을 떠났다. 젊은 장보고도 이러한 시기에 살길을 찾아 당나라로 건너갔다. 철옹성 같은 골품제도 속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출세하기는 틀렸기 때문이다.

반면, 당나라는 장보고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당나라는 이민족의 무장을 번장(番將)으로 기용하는 개방적인 정치를 펼쳤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해안지대와 가까운 쉬저우(徐州)의 무령군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해적선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는 분노한다. 이에 신라로 건너온 장보고는 흥덕왕을 알현하고 해적의 소탕을 자청한다. 왕은 1만 명의 사졸을 주고 장보고를 대사로 임명하였다. 장보고는 완도의 청해진에 본부를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드디어 바다길을 안정시켰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의 군대경험을 살려 청해진을 건설하고 왕으로부터 청해진대사라는 권한을 보장받아 황해에서 자행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킴으로써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왕자가 되는 데에는 재당신라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당으로 들어온 신라인들은 대운하와 회하(淮河) 유역에서 염전과 운송사업 등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인 승려 옌닌(圓仁)은 장보고 시대에 중국에 있었다. 그가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소금을 실은 선박이 3-5척씩 연결되어 수십 리를 끊이지 않고 가고 있다.'며, 신라인들은 운송과 교역의 중심지에 신라방을 구성하고 치외법권적인 자치활동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중 적산촌은 산둥반도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중심지였다. 장보고는 이곳에 법화원을 짓고 재당신라인들의 네트워크 장소로 만들었다. 법화원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매년 500석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였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해마다 겨울이면 법화경 강회(講會)를 열어 신라인사회의 결속을 다졌다.

장보고는 산둥 적산의 법화원과 완도의 청해진을 거점으로 당과 신라, 신라와 일본을 오가며 교통과 무역을 독점하였다.

당과는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라는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일본과는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특히, 덩저우의 적산포를 거점으로 남쪽으로 초저우(楚州)와 양저우(揚州)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신라무역상인들을 교역망에 편입시킴으로서 장보고는 재당신라인 사회를 하나의 무역망 조직으로 체계화하였다.

장보고가 황해를 주름잡으며 교역한 무역선은 교관선(交關船)이라고 불렀다. 이 배는 갑판 위에 여러 개의 선실을 갖춘 누선형(樓船形) 배로 돛도 여러 개 갖추고 있어서 역풍까지도 이용할 수 있었다.

선실이 여러 개인 것은 먼 바닷길을 오가는 만큼 화물 뿐 아니라 승객들도 함께 이동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삼국을 오가며 교역한 항로는 어느 것일까. 그는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온 연안항로는 별반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제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보다 빠른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장보고는 이제까지 축적된 항해술을 발판으로 직항로를 개발하고 운영하였다.

이는 "중국해를 3-4일 만에 건너갔고, 적산포로부터 황해를 직선으로 횡단했다"는 옌닌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9세기 초부터 신라인들은 황해와 동중국해를 직선으로 횡단하거나 사단으로 가로질러가는 가장 빠른 직항로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황해를 장악한 장보고는 삼국을 오가는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그는 신라와 남중국의 특산물은 물론,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산의 각종 진귀한 물품들을 교역하였다.

이러한 진귀한 상품들을 중국에서 실어와 신라에 유통시키고 일본에도 판매하였다. 장보고는 이러한 중개무역을 통해 얻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해상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장보고가 중개무역을 한 상품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남아시아 비취새의 깃털로 짠 목도리, 타슈켄트에서 생산되는 에메랄드 보석인 슬슬(瑟瑟)로 상감한 빗과 모자, 열대지방의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대모갑(玳瑁), 인도와 동남아시아 원산의 나무인 자단(紫檀)과 침향, 공작의 꼬리와 양털로 짠 페르시아 카펫, 당나라 모직으로 짠 담요와 각종 고급 비단 등이었다.

장보고의 무역품은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다. 미리 선금을 맡겨놓을 정도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외래물품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키기까지 하였다.

해상왕국을 건설한 장보고는 신라 왕궁에서 벌어진 왕위 찬탈을 응징하고 그 공을 내세워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등 중앙정치에도 개입하였다. 하지만 골품제도를 사수하려는 수구파 신하들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였다. 특히, 장보고의 해상왕국 건설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군소 해상세력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찾기 위해 신라의 조정과 은밀하게 결탁하였다. 결국 장보고는 이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장보고의 죽음은 청해진과 해상왕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나아가 재당신라인 사회와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교역네트워크도 붕괴되고 말았다.

신라인 장보고의 영웅적 활약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杜牧)에 의해서다. 그는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도를 뚫고 각고의 노력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한 시대적 영웅 장보고에 대한 전기를 썼다. 그는 사사로운 원한은 잊고 국가적인 우환에 목숨까지 바친 장보고를 추앙하며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고 반문했다. 그가 쓴 전기는 <신당서 동이전>에 기록되었고, 김부식 마저도 그의 <삼국사기>에 인용하였다.

장보고는 실로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는 모국인 신라에서는 반역자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경이로운 인물이었다. 이후 장보고는 역사에서 잊혀졌다. 장보고가 다시 국제적인 영웅으로 되살아난 것은 1955년이다. 하버드대의 라이샤워 교수가 장보고를 '해양산업제국의 무역왕'으로 극찬하였기 때문이다.

9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으며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장보고. 우리나라가 한중일 삼국을 호령한 영웅 장보고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청해진 유적을 발굴한 1991년부터다. 장보고가 죽은 지 천 년하고도 백여 년이 지난 후였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