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 종교 성지순례 
▲ 강화군은 갑곶순교성지에서 시작해 심도직물터, 성공회 강화성당, 교동향교, 교산교회, 전등사를 잇는 종교순례여행길을 구축해 놓았다. 사진은 갑곶순교성지로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효수당한 곳이다.


천주교 박해로 효수터 된 '갑곶나루' … 순례자 가장 많이 찾아
1893년 처음 세워진 교회와 성당·사찰·향교 잇는 코스도 운영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돌아 닿는 곳이 '갑곶순교성지'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공원이 펼쳐져 있다. 한 켠에 서 있는 3개의 비.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3인의 3위비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동상도 눈에 띈다.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울려퍼진다. 찬송가는 새소리와 어우러져 공원을 가득 메운다. 갑곶진두는 많은 순교자들이 효수 당한 장소로 많은 순례자들이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강화도는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깊은 연관을 맺은 곳이다. 1795년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철종의 조모 송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씨에게 세례를 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던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다. 강화도에 귀향해 살고 있던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도 처형된다.

1839년 가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가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통행이 어려워진다. 1845년 5월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명을 받아 선교사를 비밀리에 입국시키기 위한 해로를 개척한다. 그 길은 서울 마포를 떠 강화 갑곶 앞바다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로 1856년 베르뇌 장주교와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1857년 페롱 권 신부 등이 들어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신자들이 강화도에서 순교한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 장치선 회장과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으로 호송돼 효수를 당한다.

1866년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에 타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하는 동안 갑곶나루터는 많은 신자들이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됐다. 이때 첫번째로 갑곶진두에서 효수당한 사람이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문헌을 통해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했다. 2001년 9월엔 순교자들의 행적증언자이자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성지 안에 안장했다. 이후 사제를 파견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갑곶순교성지를 비롯해 강화도엔 기독교, 성공회, 불교, 유교 등 종교순례코스가 있다.

기독교의 '교산교회'는 1893년 미국 선교사 존스선교사가 강화에 설립된 첫 교회로 어머니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2013년 석조예배당(1961)을 개조한 강화초대 기독교선교역사관 개관했다. 두번째로 설립한 '홍익교회'는 송해면에 있다.

갑곶순교성지와 함께 천주교 순례코스로는 '성공회 강화성당'이 대표적이다. 1900년 퓨전건축양식으로 지어 동서양 건축법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축조 이후 증축을 하지 않아 더욱 의미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심도직물터'는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이 노사갈등으로 발생한 '심도직물 사건' 때 J.O.C 총재 김수환 신부가 한국 주교단 차원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개입한 첫 사건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불교순례코스는 '전등사', '보문사', '정수사'가 꼽힌다.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현존 최고(最古)의 도량이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 보물 제393호 범종을 간직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한 호국불교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 등이 있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절 뒤편에 마애석불이 조각돼 있으며 경내엔 3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당시 사용했다는 맷돌이 있다. 향나무와 1975년에 주조한 범종도 만난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마니산 동쪽에 자리잡은 정수사는 전등사, 보문사와 더불어 강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중의 하나다.

유교순례도 재미있다. '강화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 3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 남쪽 기슭에서 창건했다. 대성전엔 중국의 5성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에 창건했다. 공자를 모신 최초의 향교로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동국18현인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화군은 '갑곶순교성지~심도직물터~성공회 강화성당~교동향교~교산교회(강화초대기독교선교역사관)~전등사'를 잇는 종교 성지순례코스를 운영 중이다. 032-930-3114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목숨 걸고 순교자 유해 수습한 박순집 베드로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신앙의 증거자'로 불리는 박순집 베드로는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아 안장했다. 천주교 박해가 진행되는 시기여서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해 유해발굴과 시복시성(순교자를 복자나 성인의 품위에 올리는 예식)에 큰 역할을 했다. 1890년 제물포로 이주해 숙골(현 도화동)에서 선종할 때까지 전교 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현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로 봉직하고 있었고 서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 걸고 수습한다.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모래로 대강 덮어 놓은 시신을 손으로 파헤쳐 잘라진 목과 훼손된 신체를 찾아냈다. 잘린 머리 셋은 긴 수염을 한 데 모아 입에 물고, 시체 3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넣어 노고산에 안장했다.

박 바오로는 1843년 이들 성직자의 묘를 박씨 집안 선산인 삼성산(관악구 신림동)에 이장한다. 복잡한 서울 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때 사기 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써서 묘와 함께 묻었다.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후일 성교회가 성직자 무덤을 찾을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박 바오로는 또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와서현(용산구 한강로3가)에 안장했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 베드로는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했다.

박 바오로는 1868년 3월23일 큰아들 집에서 잡혔고, 아들 내외, 동생과 함께 포청옥에서 순교했다. 잡혀간 지 6일만에 비신자 일가들이 시신을 찾아 매장했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