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는 어떤 나라였나
삼국 지방세력 인정한 '다원주의'
불교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 공존
활발한 대외무역, 문화유산 쾌거

▲ 고려는 해상세력의 후예인 왕건이 세운 나라로 해양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벽란도를 중심으로 여러나라와 대외무역을 하며 개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또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들어온 옛 삼국출신의 지방세력을 인정하고 끌어안는 '다원주의'사회였다. 종교적으로 불교를 중시했지만 도교, 유교, 제천의식이 공존했다. 381년 세운 강화도의 대표사찰 전등사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있다.

처마 아래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3월 초의 춘풍이었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딸랑"하는 소리가 정족산 줄기를 타고 하늘로 퍼져나갔다. 봄하늘에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와 처마밑에서 웃는 듯한 나부상. 봄은 어느 새 전등사 대웅보전에 와 있었다.

삼랑성을 지나 정족산을 올라온 사람들이 숨을 고른 뒤 대웅보전 왼쪽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입춘대길. 새봄을 맞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 같을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삼배를 올렸다. 간혹 더 많은 절을 올리거나 오래도록 엎드려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건물 밖 대웅보전 앞에 서서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381년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찰이 전등사(傳燈寺)란 이름을 갖게 된 때는 13세기 중후반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간섭기.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1236~1308, 재위 1274~1308)의 부인 정화궁주는 남편을 원나라 세조의 딸에게 빼앗긴 뒤 진종사를 찾아 밤낮으로 기도를 올린다. 남편이 무사하고, 하루라도 빨리 고려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염원이었다. 이때 옥등을 시주하면서부터 전등사란 이름을 갖게 됐다.

창건당시인 4세기에도, 국모가 소망을 빌던 13세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등사의 역사는 염하의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흘러왔다. 창건 이래 지금까지, 1637년이란 기간 동안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선 까마득한 사람들이 기도를 올렸을 것이었다. 지나온 1600여년 동안 내가 지금 서 있던 이 자리엔 누가 서 있었을까, 내 뒤엔 어떤 사람들이 서 있을 것인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그들과 나와의 인연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생은 정말 윤회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부질없는 상념에 빠져 있던 중생이 "딸랑" 하는 풍경 소리에 정신을 가다듬는다.

고려사회의 특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불교국가란 사실이다. 고려의 가장 큰 명절이자 축제는 팔관회(八關會)였다. 팔관회는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해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던 행사다. 종교적으로 불교가 중심인 국가였지만 고려엔 유교, 도교, 풍수지리와 같은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다. 지나치게 불교만을 중시할 경우 사찰이 너무 많아지거나 승려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폐단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팔관회와 함께 집집마다 등을 밝혀 부처의 자비와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던 연등회(燃燈會) 역시 불교행사였다. 그렇지만 고려의 공식행사에선 도교 유교 제천의식 등이 다양하게 용인됐다.

매년 11월 개경과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는 단순한 제의의 차원을 넘어선 행사였다. 국토를 지키는 신, 하늘신, 바다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음악과 무용 같은 예술행사를 함께 치름으로써 전국민적 행사로 승화시켰다. 더 주목할 것은 국왕과 관리, 지방 수령 등은 물론, 여진족 거란 송나라 일본 등 외국인들까지 참석하는 국제적 행사였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 외국인들은 고려국왕에게 특산물을 바쳤고, 물건을 사고 팔기도 했다. 개경의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팔관회와 같은 국제행사의 개최가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역대 그 어느 왕조보다도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던 고려였다. 벽란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대외무역을 펼친 고려가 인쇄술, 고려청자 등 눈부신 문화유산을 빚어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개방성은 해양국가란 특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조상들은 개경을 기반으로 한 해상세력이었다. 대외무역이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바다에서의 교역은 국내외를 아우르는 광범한 원거리 무역을 의미한다. 생산·판매는 물론, 유통과 중개를 통해서도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해상세력이란 왕건의 집안 배경이 고려를 해양국가로 만드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친 셈이다. 왕건이 궁예의 절대적 신임을 받기 시작한 것도 해군대장으로 후백제 견훤의 근거지인 나주를 점령하면서 부터였다.

고려는 앞서 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 뒤 다양한 인적 물적 자원을 흡수한다. 삼국 출신 지방세력을 인정하고 문화를 존중하며 왕조에 협력하도록 한 것이다. 박종기 국민대 사학과 교수는 이를 가리켜 '다원주의'라고 정의했다. 다원주의는 다양성과 통일성, 개방성과 역동성에 바탕한 사상을 가리킨다. 누구에게나 문호를 열고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간 고려는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눈부신 역사·문화 유산을 남긴다.

전등사에 남은 고려의 흔적을 따라 정족산가궐지(鼎足山假闕址)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궐은 전시와 같은 유사시 왕이 피신하는 장소다. 대몽항쟁기간이던 1259년 고려 고종(23대, 1213~1259재위) 임금은 1259년 전등사에 가궐을 짓는다.

풍수도참가 백승현이 "삼랑성과 신니동에 가궐을 지으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는 건의에 따라 가궐을 세웠는데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 두었다고 전한다. 1259년 고종이 승하한 뒤 왕위를 물려받은 원종(24대, 1259~1274 재위)은 1264년 진종사를 찾아 '대불정오성도량'을 열기도 한다. 정족산가궐지는 몽골침입 때 불에 타 사라졌으며 현재 궐터만 남은 상태다.

가궐지에 서자 전등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봄쑥, 봄냉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얼마 뒤 이 자리에선 봄의 전령사들이 얼굴을 내밀 것이다. 거란과 몽골을 이겨내고 한민족의 역사를 지켜낸 고려민초들의 생명력처럼.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전등사 한바퀴]

'세개의 봉우리' 품은 최초의 사찰
운치있는 숲길 돌고 전통차 한 잔
▲ 전등사 경내를 사람들이 오르고 있다.


전등사는 삼국시대인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창건한 절로 '해동비창불우'라고도 불렀다. 전등사는 조선시대인 17세기 초에 화재로 불에 탔으나 곧바로 중창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는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약사전은 이 당시 지어진 건물이다.

전등사 위쪽에 자리한 정족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들어서 있다. 정족산사고는 17세기 후반에 설치됐다가 소실된 것을 90년대 후반 재건축한 것이다. 이를 비롯해 전등사엔 대웅전, 약사전, 철종 등 보물 3점을 비롯해 대웅전목조삼존불 좌상, 대조루 등 많은 지정문화재가 있다. 전등사 철종은 고려시대의 범종으로 높이 1.64m, 입지름 1m로 보물 제393호다. 철제종으로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도 청아하다.

전등사는 삼랑성 혹은 정족산성에 둘러싸여 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전등사를 품은 산이 세 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마치 다리가 3개인 솥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족산성은 19세기 후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여진 장소이기도 하다. 이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면서 프랑스군은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전등사 동문 옆 승전비와 비각은 당시 조선군이 승리한 전쟁이었음을 알려준다.

사찰로 들어가기 위해 동문이나 남문을 지나 오르다보면 사찰에 거의 다 와서 찻집을 만난다. 연꽃빵과 대추차, 오미자차로 잘 알려진 '죽림다원'이다. 대웅보전 옆에는 불교나 인문서적, 염주, 목걸이 등을 파는 서점도 있다. 032-937-0125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