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지난달 말 전라북도 무주로 산골여행을 떠났다. 덕유산 자락을 지나다 보니 설천이라는 지명이 정겹다. 설천(雪川)이라, 냇가에도 눈이 흐르는 고장인가. 인터넷에 떠도는 명소나 맛집들을 피해 면소재지들만 찾아 어슬렁거렸다. 발 닿는 곳마다 우리 농촌의 변화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농가주택들이 곧 수도권의 전원주택급이었다. '저 푸른 초원위에…'라며 부러워 하던 선진국 농촌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이튿날 진안으로 넘어가니 부귀면이라는 지명이 또 발길을 붙든다. 얼마나 부자들이길래, 하며 읍내 구경에 나섰다. 대도시에서는 멸종된 소리사를 오랜만에 보았다. 간판은 중화요리지만 돼지국밥까지 파는 식당도 있었다. 면사무소 앞 식당은 맛집일 확률이 크다. 백반을 시켰는데도 돼지불고기가 수북하게 나와 술생각이 나게 했다. 첩첩의 산들을 내다보다가 문득 저 골짜기들에도 '자연인'이 있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 이상 남자층에서 한 종편채널의 '나는 자연인이다' 바람이 소리소문없이 거세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자급자족하는 외톨이 삶들을 그려내는 단순한 포맷이다. 큰 병을 얻었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사연들도 가지가지다. 최근에는 여성 자연인, 탈북 자연인, 해외동포 자연인, 공무원 연금형 자연인까지 등장했다. 굳이 본방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재방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다. 포털 검색을 넣어보니 '나는 자연인이다'를 재방송하는 케이블 채널이 15개에 달했다. 하루 5회까지 내보내는 채널도 있어 매일 50여회나 재방영될 정도다. 카페나 블로그에는 '자연인이 살기 좋은 산' 매물들도 보인다. ▶'자연인' 때문에 아내와 채널 다툼이 벌어지는 집들도 적지않은 모양이다. 아내 입장에서는 '저 양반이 저러다 정말 산으로 들어가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극력 채널을 돌리려 든다. 한 후배는 아내 방해없이 '자연인'을 보는 비법까지 찾아냈다. 자기는 저런 삶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저런 미친', '말도 안 돼'하면서 다 본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듯 주말에 '자연인' 다시보기로 밤을 새웠다는 사연도 있다. 고정 시청률이 있다 보니 비슷비슷한 프로도 우후죽순이다. ▶도시로 나가지 않으면 낙오된 듯 여겼던 생각이 뒤바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들에게는 본래 원시에의 로망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튼 산이 7할인 나라에서 산으로 가는 이들을 굳이 말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